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공 Mar 21. 2024

[노동 일기 #0] 백수가 체질

<무한도전> 시청과 글쓰기와 식사가 이뤄진 소파 겸 책상 겸 식탁.


사원 2년 차로 입사해 과장 1년 차까지. 연예 매체에서 기자로 일하다 홍보대행사 AE가 된 후 꼬박 5년이었다. 어리바리 스물넷에 처음 사회에 던져진 이후 내내 치이기만 하다, 이제야 조금은 어른이 된 것 같다고 느끼던 차였다. 여느 직장인과 다를 바 없이 가슴 속에 사직서를 품고 다니긴 했는데, 그것을 그날 그렇게 꺼내게 될 줄이야.


큰소리치긴 했지만 걱정이 없을 리 없었다. 물론 한 달 정도는 해방감을 느낄 테지. 늦잠도 낮잠도 맘껏 자고, 보고 싶었던 드라마를 몰아보는 맛도 있겠지. 하지만 비상금은 여름날 아스팔트 바닥에 쏟아버린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실시간으로 증발할 것이고, 어쩌면 남편은 은근히 눈치를 줄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스스로 합리화하다, 게을러지다, 결국 자괴감에 빠져 사직서를 내던 순간을 백 한 번쯤 후회할 것만 같았다.


웬걸, 퇴사 이후의 삶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아니 어쩌면 특별했다. 나와 비슷한 생각으로 퇴사를 망설이는 사람들을 위해, 오피스 단지에 커다란 옥외광고라도 걸고 싶어질 정도였다. 하루 24시간이 온전히 내 것이라는 것이 엄청난 성취로 다가왔다.


평일에 오전 7시쯤 일어났다. 경쾌한 분위기의 에센셜을 틀고 집안 곳곳을 정리하고 청소했다. 매일 무슨 빨래가 그렇게 나오는지, 세탁기와 건조기는 거의 매일 돌아갔다. 청소가 끝나면 엄마가 보내준 사과 한 알을 깎아 먹었다. 동시에 TV에 철 지난 <무한도전>을 틀었다. 박명수의 “Yes, I can.”과 유재석의 “나 6천 원 있어요.”는 열 번을 다시 봐도 웃겼다. 정리해고 당하는 정준하의 모습에는 여전히 코끝이 찡했고.


오전을 꽉 채운 후에는 글을 썼다. 사실 퇴사를 하게 된 여러 이유 중 하나였다. 아카데미에서 만난 한 작가님이 절대 생업을 놓지 말라고 했지만, 이미 놓게 된 이상… 글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에 여러 인물을 만들고 그들의 관계도를 그렸다. 어떤 외모일지, 어떤 성격일지, 어떤 말투일지 상상하면서 스토리를 써 나갔다.


하루 동안 써야지, 하고 계획했던 분량을 채우면 곧바로 노트북을 덮었다. 그때부턴 자유였다. 오전에 보던 <무한도전>을 마저 보기도 했고, 유독 글공부에 지친 어떤 날엔 침대에 다이빙하듯 스러지기도 했다. 끔찍한 요리 실력으로 김치볶음밥 따위를 만들어 먹기도 했고, 가끔은 남편 퇴근 시간에 맞춰 저녁을 준비하기도 했다. 밀키트 최고.


그렇게 11개월가량을 쉬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약 8년 만에, 서른두 살이 돼서, 깨닫고 말았다. 백수가 체질이었다는 사실을!


백수는 누군가 걱정하는 것처럼 불쌍하지 않았고, 그의 삶은 누군가 예상하듯 캄캄하지도 않았다. 물론 그 시간에 쓴 글이 빛을 발하지도 않았다. (눈물) 그리고 퇴직금은 신년을 몇 초 앞둔 카운트다운 알람처럼, 0을 향해 빠르게 달렸다. 다만 인생에서 모르고 지나쳤을 여유로운 매일과, 온 시간과 마음을 들여 글을 쓰는 짜릿함과, 마음만 먹으면 대낮에도 <무한도전>을 보며 맥주를 마실 수 있다는 자신감이 나를 충전했다.


근데, 백수 찬양 이후에 취직 이야기를 쓰게 될 것 같은 느낌이다. 빵빵하게 충전된 나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작가의 이전글 10년째 뭔가를 쓰는 사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