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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공 Mar 27. 2024

[노동 일기 #1] 홍보는 아니고 PR입니다만?

입사 확정 후 출근 축하(위로) 파티.


인간은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가. 기억은 왜 미화되고 난리인가.


한없이 자유롭던 나를 꾀어낸 것은 잡코리아에서 활동하던 헤드헌터였다. 덕분에 나는 정신을 차리니 수인분당선 서울숲 역 한 출구 앞에 서있었다. 태어나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30분 후엔 경력직 면접이 시작될 참이었다.


억지로 끌려… 사실 잡코리아 이력서를 열댓 번 수정한 것은 나였다. 외장하드를 뒤지고 뒤져 11개월 전까지 진행했던 업무를 메모해 가며 복기한 것도 나였다. 면접룩으로 고심해 선택한 까만 여름 니트 셋업은 회사가 가진 트렌디한 이미지를 반영한 결과였다. 그러니까, 되게 열심히 준비했다는 뜻이다.


홍보대행사를 때려치우고 나올 땐 홍보 업계 쪽으로 발도 뻗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근데 PR(=홍보)팀 면접이라니.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나를 그토록 동요하게 만든 건, 커다랗고 깨끗한 건물이었다. 왠지 있어 보이는 그것이라면 약 8년 간의 사회생활로 잔뜩 해진 내 몸과 마음을 치유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그보다 더 명확한 이유는 면접 중에 찾게 됐다. 면접 전엔 몰랐는데, 입사 시 콘텐츠를 만들고 글을 쓰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별안간 가슴이 뛰어 버렸다. 휴가 중에도 고객사와 기자의 전화를 받아야 했던 지난날과는 분명히 다른 내일이 펼쳐지리라. 창작의 고통과 내글구려병에 신음하던 지난날을 잊고 잘할 수 있는 일로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


며칠 뒤 면접 합격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안도감과 자괴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어느 날은 창작을 하고 싶었다. 내가 만든 인물들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고민하는 것이 내 앞날을 고민하는 것보다 더 뜨거웠다. 그런데 또 어느 날은 노트북 덮어버리고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편하게 놀고먹고 싶었다. 평일 낮 백화점 식품관에서 쇼핑백을 아무렇게 던져 놓고 포케를 먹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 나인 투 식스 직장인이 돼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라니. 결국은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자의 그럴싸한 합리화였다.


하지만 수중에 돈은 떨어지고 입사는 코앞인 여자에게 자기 객관화는 꽤 사번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별 수 있나, 지금 할 수 있는 걸 해야지. 그리고 은희경 작가의 <태연한 인생>을 다시 꺼냈다. 문장 자체가 영감이라 오래 좋아한 책이기도 하지만, 요즘처럼 태연하지 않지만 태연하게 구는 나 자신이 낯설고 미울 때 읽으면 특히 효과가 좋은 탓이다. 유독 어려운 문제집 맨 뒤에 삽입된 정답 및 해설집 같은 그 책은, 이렇게 말했다.


“…실은요, 운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뭘 잘못하고 있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근데 그게 뭔지 모르겠거든요. 사회에도 보탬이 되고 뭔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데 명품 같은 거 실컷 사게 돈도 좀 많았으면 좋겠어요. 가끔은요, 나 자신이 위선자 같아요. 진짜 얼굴하고 가짜 얼굴이 따로 있는 거, 그런 거요…”


“그건 위선이 아니지. 위선자들은 진짜 얼굴과 가짜 얼굴 하나씩을 가지고 있지만, 좋은 사람이 되고 싶고 돈도 쓰고 싶은 건 둘 다 진짜 얼굴이니까”


그러니까 결론은… 이 회사에서 나, 잘할 수 있을까? 드디어 (진짜) 노동 일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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