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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엽 Dec 27. 2015

she was. I am, #5

둘의 이야기, 일방의 기록

#5.

     비장하게, 냉장고 문을 열어젖힌 나는 사과 한 알을 집어 들어 한입 거칠게 베어 물었다. 사과 껍질과 속살은 물론 씨와 꼭지까지 씹혀 들어왔다. 쌉싸롬한 맛과 까끌한 질감이 입 안을 채우자, 더욱 비장한 기분이 되는 것을 느꼈다. 나는 요 며칠간 계속해서 이런 상태로 나 자신을 몰아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곧 비장함을 유지하고 있다. 내가 추구하는 ‘그리하여 그 둘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답니다' 라는 엔딩에서, ‘그리하여' 에 해당하는 중요한 대목이 지금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거지가 왕자로 거듭나고 하녀가 공주로 변모할 수 있는 이 시점에서, 왕자도 아닌 내가 평상시처럼 흐리멍덩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이 고행의 순간들은 반드시 보상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맹목적인 믿음이 있고, 눈앞에 보이는 그녀라는 뚜렷한 목표를 놓친다면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나의 비장함은 날이 갈수록 단단해지고 있었다. 


   이 추운 겨울 그것도 새벽에 나갈 정도로 맥주가 마시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내가 잘못을 하고 용서를 구하려 이런 저런 설명을 하고 있을 때 그녀는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잘못 그 자체보다 너무 침착한 모습이 싫다고. 그녀는 두서 없는 변명이 더 솔직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보다. 그리고 그녀의 보폭에 맞춰 걷고 있는 난 그 기분을 알 것 같았다. 알 것 같은 그 기분에 이끌려 취하기도 힘든 맥주로 어찌나 애썼던지. 그렇게 술을 무기 삼아 내 정신을 무너뜨리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다.


  어눌한 말투로 논리에 맞지도 않은 말을 하고 또 하더라도 그녀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 시도가 진심을 전하기에 효과적이라 판단했다. 우리 걸음걸이가 그래왔던 대로 그녀 기준에 맞는 방법을 택했다. 이러한 상황판단 역시 침착한 모습으로 비춰 질까 신경 쓰이던 나였다.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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