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의 이야기, 일방의 기록
#4.
수업 안 갔어.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난 목소리만 들어도 오롯이 그 마음을 알 수 있으니 문장이 갖고 있는 의미를 해석할 필요도 없었다. 그 곳에서의 적응이 얼마나 힘들고 그것에 우선해서 그녀가 그녀자신에게 얼마나 실망했는지 그녀가 내는 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뒤이어 각 상황을, 그녀가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며 한숨과 격양을 섞어 내놓는 글자들은 내 가설이 맞았음을 입증해줄 뿐이었다. 그녀의 뜸한 연락에 대한 내 칭얼거림의 순위는, 그녀의 현안 앞에 저만치 뒤로 밀려버렸다. 그녀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다시금 그녀가 그곳 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것이 이 통화에서 내게 주어진 숙제다. 내가 조금 더 나만 생각하는 놈이었다면 마냥, 하지만 티는 안날 정도로, 그녀 생각만이 옳은 것처럼 굴었을 것이다. 그 편이 그녀의 그 곳 생활의 적응을 방해하고, 내게 기대게끔 하는 길이니까.
힘들다고 나부터 찾는 칭찬받을 일을 한 그녀에게 (우리에 우선해서 그녀가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내가 강한 어조로 충고를 하고, (그녀에게서 아무런 부스럼도 발견 못하는) 내가 괜한 꾸중 하는 것보다는 그녀의 무조건적인 안식처가 되어 주는 것이 그녀에게 있어서만큼은 객관성을 완벽하게 잃어버린 나에게 더 어울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이 더 커지기도 전에 이미 난 그녀에게 도움이 될 말들을 찾기에 여념이 없다. 전력을 다한 수고에도 '참 잘했어요' 도장 같은 보상은 없었다. 며칠 지나 포스팅되는 그녀가 잘 지내고 있는 사진 정도가 내가 주어진 숙제를 잘 해냈음을 증명할 뿐이었다. 이기적이며 당연하게 기쁘지 않았다. 어찌됐건 나 없이도 웃고 있는 그녀 얼굴을 봐야하는 것이니까. 나의 노고를 치하하는 그녀의 미니홈피 다이어리만이 제대로된 보상이었다. 그 후로도 그런 생각이 자라나려하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 정도의 보상이 계속되었다.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