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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오늘 나는 배를 다 따지 않았을까?

조용히 내어주는 가을의 선물

by 봄이

이른 가을, 깊고 맑은 하늘 위로 뭉게구름이 흘러간다.
살랑이는 바람은 나뭇잎 사이를 스치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남기고, 조금씩 색을 바꾸어가는 가을나무들은 햇살에 반짝인다. 떨어진 잎들은 마치 시간을 담은 듯 차분히 땅 위에 내려앉는다.
배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볕은 금빛 물결처럼 잎과 과실을 감싸 안는다. 바람과 빛줄기가 만들어내는 미세한 흔들림은 스산한 마음을 조용히 어루만진다.

그 따스한 공기 속에서, 나는 뒷마당으로 나와 배를 수확했다.

거름을 주거나, 뙤약볕 아래 물을 챙겨 준 적은 없지만, 이 배나무는 해마다 변함없이 향긋한 과실을 한 바구니 가득 안겨준다.

나무는 이 집에 오기 전부터 그 자리를 지켰다.
부채처럼 펼친 가지마다, 이전 주인이 정성스레 다듬어 온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다. 가지마다 깃든 손길과 시간이 보는 이의 마음에도 잔잔한 감탄을 남긴다.

배나무는 매년 사람과 새들에게 넉넉한 선물을 내준다.
겉껍질은 거칠지만, 속살은 부드럽게 무르익어 은근한 단맛을 품고 있다. 반쯤 쪼아 먹힌 배나 흠집이 있는 못생긴 배도 많지만, 맛만큼은 거친 겉모습을 무색하게 한다.

서양배는 따서 이틀 정도 숙성하면 버터처럼 부드러워지고, 달콤함이 더해진다.
앉은 자리에서 서너 개를 깎아 먹어도 쉽게 질리지 않는다.

오늘 나는 모든 과실을 따지 않았다.
딸아이가 오면 함께 따고, 함께 맛볼 수 있도록 일부는 남겨 두었다.
작년 가을, 딸과 함께 배를 수확하며 즐거워하던 모습이 아직 눈앞에 선하다.
그 기쁨을 혼자 간직하고 싶지 않았다.

언제쯤 딸아이와 함께 서서 배를 깎아 먹으며 웃고 이야기할까?


그 순간을 기다리는 마음이 오늘따라 더욱 간절하다.

배 한 조각을 입에 넣는 순간, 혀끝에는 은근한 단맛이 맴돈다.
달콤함을 음미하며 배가 주는 섬세한 맛을 천천히 느낀다.
그 맛은 평범한 과일의 맛을 넘어, 기다림이 선물한 작은 기쁨과 가을의 온기를 함께 담고 있다.


가꾸지 않아도 해마다 풍성하게 열매를 내어주는 배나무 앞에 서면, 자연이 얼마나 너그럽고 무한한 선물을 주는지 새삼 느낀다.

흙과 바람과 햇살만으로도 이렇게 향긋한 과실을 내어주는 자연의 마음은, 어쩌면 우리가 삶 속에서 본받아야 할 방식인지도 모른다.

꾸미지 않아도, 증명하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그늘이 되고 작은 결실이 되어줄 때, 비로소 가장 빛나고 충만해진다는 것을 나는 조용히 느낀다.


과연 나도 이 배나무처럼, 그저 제 자리에 서서 사랑과 배려를, 혹은 작은 위로와 희망을 자연스레 세상에 내어줄 수 있을까?
오늘 내 삶은 어떤 그늘을 만들고, 어떤 결실을 맺고 있을까?
그 답을 찾아가는 길 자체가, 마치 가을 햇살처럼 조용하지만 확실한 기쁨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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