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한 분 더 생겼다
넷플릭스 <조앤 디디온의 초상>이라는 인물 다큐멘터리를 본 후 며칠 동안 이 언니한테 푹 빠져서 구글링을 열심히 해댔다.
한국에서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언니는 미국을 대표하는 저널리스트이자 에세이스트, 소설가이다.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하고. 멋진 여성들은 나에게는 모두 언니이므로 조앤 디디온은 언니라고 표현했지만은 이 분은 1932년에 탄생하시고 2017년 현재 82세를 맞으신 어르신이다. 미국 문학계의 거물. 사회 불안과 정치 스캔들 등 혼란스러웠던 미국 당대의 어두운 구석을 글로써 대담하게 표현했던 에세이스트. 전통적인 저널리즘의 객관성과 단편성을 거부하면서 저널리스트의 목소리와 해설을 곁들인 뉴 저널리즘을 대표하는 작가다. 그렇다고 하여 쓰여진 책으로서만 회상되는 과거 속 인물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언니는 2년 전인 2015년에 80세의 나이로 셀린느의 뮤즈가 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방년이란 단어는 이십세 전후의 나이를 뜻하는 것이지만은 젊은 꽃다운 때를 방년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방년 80세라고 표현해도 좋을까. 셀린느의 화보에서 얼굴의 절반이나 차지하는 큼지막한 선글라스를 끼고 카메라를 응시하는 디디온의 모습은 젊은 시절 사진에서 풍겨져 오는 지성미와 아우라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지성적이고 우아한 그녀의 얼굴은 같은 여자가 봐도 정말 아름답다.
큼지막한 선글라스 뒤 가려진 무표정과 팔짱을 끼고 무심한듯 한쪽 손의 손가락 사이에 물고있는 담배 한 개비. 그리고 무심한듯 하면서도 지성적인 우아함이 느껴지는 패션감각. 정갈한 옷매무새와 자연스럽지만 한결같이 손질된 헤어스타일에서 그녀의 완벽주의자적이고 섬세한 성향이 엿보인다. 디디온의 표정은 차갑지만 한편으로는 따뜻함이 느껴진다. 디디온이 인터뷰했던 영상자료들을 찾아보면 이 언니가 글에 비해서 말주변이 없는 걸 느낄 수 있는데 말하고자 하는 단어가 잘 생각이 안나는지 같은 단어를 반복하거나 고민하다가 모르겠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다큐 인터뷰만 봐도 지휘하듯이 허공을 휘저으며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확실히 말보다는 글인 분이시구나를 느낌과 동시에 그런 인간적인 면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글도 기깔나게 잘쓰는데 말주변까지 청산유수면 반칙이다.
캘리포니아에서 줄곧 성장한 그녀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후 패션매거진 보그에서 주최한 에세이 공모전에 당선되어 에디터로 취직하게 된다. 보그에서 7년 동안 카피라이터와 피쳐에디터로 일하는 동안 고향 캘리포니아에 대한 향수로 틈틈히 소설을 쓰고는 했는데 글이 완성된 이후 작가이자 친구였던 존 그레고리 던의 도움으로 소설을 출간한다. 와중에 함께 일하며 관계가 발전한 둘은 일년 뒤 결혼하여 캘리포니아에 자리를 잡게 된다. 그리고 몇년 뒤 둘 사이에 입양딸 하나가 생겼다. 디디온과 그의 남편 그레고리 던은 부부이전에 서로의 가장 첫번째 독자이자 가장 열렬한 독자였다. 그레고리 던의 편집을 거치지 않은 디디온의 글은 없다고 한다. 부부이면서 동료이자 조언자이기도 했던 두 사람의 관계가 부럽다. 다큐에서 디디온은 던이 지독하게 다혈질적이었다고 말하긴 하여도 이야기 가운데 애정이 느껴진다.
글쓰는 사람 중엔 노력형 작가과 재능을 타고난 작가가 있다고들 하는데. 이 언니는 전자보다는 후자다. 끊임없이 무엇인가 보고 관찰하려는 노력과 자기 성찰의 태도, 완벽주의적인 성격이 디디온을 인정받는 작가로 만들었다. "I write entirely to find out what I'm thinking, what I'm looking at, what I see and what it means. What I want and what I fear." 라고 말한 데서 알 수 있다. 생각하는 것, 보고 있는 것, 마주친 것,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스스로 알기 위해 글을 썼고 자신이 원하는 것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실체를 마주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나도 가끔 그런 것을 느낀다. 나는 많은 것을 보고 읽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런 감정들과 생각들을 머릿속에 꾹꾹 눌러담아지면 뭔가 소화불량의 상태처럼 뇌가 더부룩해지는 기분이 든다. 속이 울렁울렁하기도 하고. 소화가 덜된 느낌이다. 많이 보고 느낀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 내 것이 되는 것도 결코 아닌 것 같다. 부풀어오른 생각과 감정들이 부유해 있다가 언제 있었냐는 듯이 사라진다. 사람들은 사진으로 순간을 붙들어 놓으려 하기도 하고 네모네모한 인터넷 공간에 내 것이야! 하고 차곡차곡 담아 두려고들 하지만 그것이 온전히 당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나는 회의적이다. 기억력이 매우 떨어지는 나는 그 방편으로 대신 메모를 택했지만 이것도 마찬가지로 부족하다. 뭔가 완벽히 내 것을 만드려면 써봐야 안다. 보고 느낀 것들을 완성된 글로 정리하다보면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들이 잘못된 것이거나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점을 느끼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답이 나지 않아 답답한 문제들도 일단 펜을 들고 무엇이라고 적어 내려가다보면 의도치 않게 어이없이 결론이 날 때도 있다.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글을 쓰면서 나에게 질문을 던져보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
디디온은 한 해에 남편과 딸을 동시에 잃었다. <The Tear of Magical Thinking>은 남편인 그레고리 던을 잃은 상실감에 쓴 책이다. 상실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그 상실을 전혀 공감할 수 없다. 상처를 겪어내야 하는 사람은 당사자뿐이다. 조앤 디디온은 두차례의 상실을 두 권의 책으로 극복해내었다. 정말 강인한 사람인 거 같다. 남편도 딸도 없는 집에 매일같이 홀로 남겨져 고독한 책상 앞에 앉아 지난날의 기억과 추억들을 떠올리며 한 자 한 자 써내려가는 심정은 상상만으로도 잔인하고 슬프다. 한단어 한문장 한단락이 디디안에게는 이별한 두 사람에 대한 애도이자 작별 인사가 아니였을까 싶다. 딸의 죽음을 이야기한 책 <Blue Nights>를 집필을 하는 동안 디디온은 딸과 늘 함께 하고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책을 다 쓰고나니 영원한 이별을 마주한 것 같아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고. 조앤 디디온에게 글을 쓰는 행위란 생계 수단 이전에 그녀를 살아있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넷플릭스 제작 다큐멘터리<조앤 디디온의 초상>은 디디온의 조카인 그리핀 던이 연출했고 2017년 10월 말 개봉했다. 넥플릭스 스트리밍 사이트를 통해 볼 수 있다. 조만간 책도 읽어봐야겠다. 조앤 디디온의 작품 중에는 <푸른밤>과 <상실(원제 The Tear of Magical Thinking)> 두 권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