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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빛나 Sep 04. 2023

세 마리의 개와 식물

2

그때 키가 큰 나무들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괜찮다는 듯 가지를 흔들어 보였다. 나는 뭐가 괜찮은 건지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었다. 나무들이 일으킨 작은 바람이 좋았다. 나는 몸에 힘을 빼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나뭇잎들 사이로 길이 보였다. 미로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그 길을 통해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가끔 새들이 그 길을 가로지르기도 했다. 무턱대고 슾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여기는 아무도 침범하지 않는구나. 문득 하늘에 닿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주변 나무들에게 나를 올려달라 말했다. 들꽃들이 수근덕거렸고 나무들은 흔쾌히 좋다고 했다. 나무들이 분주히 움직이자 하늘길이 넓어졌다. 내가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았던 햇살이 눈처럼 내 머리 위로 쌓였다. 좋은 기분이었다. 달콤한 맛이 머리 끝에서부터 퍼졌다. 손 끝과 뿌리 끝이 찌릿했다. 흙속에서 나와 튼튼한 뿌리로 마음껏 달리는 상상. 어딘지 모를 곳을 하염없이 뛰고 물웅덩이에 드러눕기도 했다가, 거대한 바위 틈에도 살아봤다가….

 차례대로 상상 속 장면을 그리던 중, 가지머디에 알싸한 느낌이 들었다. 나무들이 하하하, 웃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아까보다 더 기분이 좋아졌다. 주위를 둘러보자 들꽃은 먼지처럼 보였고, 키가 큰 나무들이 키가 더 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건물, 회색 도로, 쓰레기더미 주변을 배회하는 벌레들,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차도 없었다. 꿈인 걸 알지만 좋았다. 좋다, 참 좋다, 여기 살고 싶다, 하고 중얼거리자 울고 싶어졌다. 순간 키가 큰 나에게서 빗방울보다 큰 물이 쏟아졌다. 나무들이 환호나는 소리가 났고 나는 더 크게 울었다. 꼴값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이런 염병.”

혀를 끌끌끌… 차는 소리가 들렸다.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가 쏟아지고. 무너지는 소리가 무너지고. 없어지는 꿈이 없어졌다. 눈을 떴다. 식물들은 가만히 서 있었다. 인간은 세 마리의 개가 남긴 흔적을 정리하고 있었다. 봉투에 테이프를 붙이고 플라스틱 쓰레기들을 주워 담는 인간을 보며 나는 인간에게 들릴만큼 크게 울어보고 싶어졌다. 엉엉, 소리를 내 봤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고 그저 엉엉, 하는 말을 한 식물이 됐을 뿐이었다. 한 번 더 엉엉, 하고 슬픔이 묻어나지 않은 소리를 낸 뒤 나는 인간을 지켜보았다. 개들이 어질러놓은 흔적을 어느정도 정리하고 나서, 인간은 궁시렁거리며 화훼 속으로 걸어왔다. 귀를 기울여 보면….

 미친 것들, 정신머리 없는 것들, 썩을 놈들, 양심도 없는 놈들. 등의 말이 들렸다.


 개들의 빛나던 눈동자가 떠올랐다. 인간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내 가지 중 하나가 부러진 느낌. 이건 좀 과한가. 아무튼. 식물들은 인간이 뿜어내는 분노에 기가 죽어 입을 꾹 닫고 있었다. 오늘은 우리 중 누가 인간의 손에 들려나갈까. 우리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가게로 들어간 인간. 발걸음 몇 번이 울리고 혀를 차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리고, 기척이 완벽히 사라진 후에야 식물들은 기지개를 켰다. 나는 여전히 목이 마르다. 다시 꿈 속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는 소리라곤 바람이 부는 소리, 바람에 흔들린 잎사귀들이 부딪히는 소리….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잠에 가까워지고 키 큰 나무들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 들꽃들이 속삭이는 말들…. 상처받는 날카로운 말이 없는 꿈의로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나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쓸쓸함을 맛보지 않아도 될 텐데. 졸음에 잠겨 있을 때, 드르륵 쾅, 하난 소리가 들렸다. 눈이 번쩍 떠질 정도로 큰 소음이었다. 문을 열고 나온 인간은 어딘가 화가 난 표정이었다. 머리에는 롤을 감은 상태였는데, 왠지 귀여운 머리와 잔뜩 뿔이 난 얼굴이 어울리지 않아 웃음이 났다. 인간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 미친 놈들, 정신머리 없는 놈들, 썩을 놈들, 양심도 없는 놈들. 같은 말이지만 아까와 분위기가 다른 것처럼 들리는 이유가 뭘까. 악의가 한층 사그라들어 있었다. 인간의 손에는 물이 묻은 접시가 있었다. 내용물은 보이지 않았다. 인간은 투덜거리며 개들이 헤집어놨던 쓰레기더미 앞쪽으로 갔다. 잠깐 고민하는 듯 싶더니 쓰레기더미 앞이 아닌 맞은편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그 순간 인간의 얼굴에 비친 희미한 미소. 개들에게 밥을 주려는 걸까. 눈치를 챈 식물들이 자기도 목이 마르다며 칭얼거렸다. 그래봤자 인간은 너네의 투정을 들을 수 없어.

….

 인간은 접시에 쥐약을 탔을까? 그 미소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 인간이 개를 죽이는 순간을 떠올리니 마음이 내려앉는 듯했다. 수분에 잠식당하는 기분…. 내가 키가 한참 커져서 엉엉 울었던 그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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