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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빛나 Sep 10. 2023

언니와 나

첫 언니와 두번째 언니

옛날부터 나에게는 참 많은 언니들이 있었다. 언니,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얼굴은 사촌 언니. 이름은 뚜렷이 기억나지만 왠지 여기서 실명을 언급하면 실례일 듯해 미정이라고 부르겠다. 미정이 언니는 선하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 고모네 집에서 살았고 미정이 언니는 고모의 딸이다. 어렸을 때라 기억은 안 나지만, 언니는 내가 배설할 때(? ㅋㅋ ) 노래도 불러 주고 밥도 해 주고. 외동이었던 나에게는 최초의 언니였다. 물론 친척 중 다른 언니들도 많았지만, 진정한 언니라고 생각하는 건 미정 언니 뿐이었다. 내가 조금 자란 뒤의 기억.


 나는 그때도 언니의 집에서 지냈었고 언니 방에서는 늘 좋은 냄새가 났다. 무정이라는 오빠도 있었는데, 무정과 미정은 매일 투닥거렸다. 매일 싸우고 매일 서로를 물고 뜯다가 어느 날에는 누구보다 서로를 아끼고. 그러는 둘을 보고 있으면 왠지 나는 낄 수 없을 듯해서 이상한 기분이 들곤 했다. 언니네 집에는 피아노가 있었고 언니는 피아노를 잘 쳤다. 언니가 피아노를 치면 나는 옆에 서서 배에 손을 모으고 노래를 한다. 가요를 부를 때도 있었고 동요를 부를 때도 있었는데, 나는 언니가 노래를 잘한다며 칭찬해 줄 때가 좋았다. 언니랑 같이 산책을 하고 같이 운동을 하고 언니가 헤어졌던 날 얘기를 듣고 함께 노래방에 갔다가 우는 언니의 모습을 보고 언니가 만들어 준 김치볶음밥을 먹고 마요네즈를 잔뜩 뿌린 참치를 먹고…. 언니네 집은 고급스럽고 항상 좋은 냄새가 났다. 언니는 화장품도 많고 예쁜 옷도 있고 언니네 집의 싱크대는 미끌거리지 않고 냉장고 속은 정갈하고 얼음이 나오는 정수기가 있고. 고모는 당당하고 멋있었고.


 우리 집은 냉장고가 뒤죽박죽이었고 좋은 냄새라기보다는 왠지 퀘퀘한 냄새가 났고 아빠는 슬펐고 나도 슬펐고 아빠와 내가 함께일 때는 웃기도 싸우기도 했지만 싸우는 날이 더 많았다. 집에서는 어디서 들어왔는지 모를 벌레들이 자꾸만 등장했고 나는 무서워 죽겠어서 빽 소리를 지르고 아빠는 네 방이 더러워서 그렇다며 화를 내고 사실이지만 왠지 억울해지고 취향은 어느정도 생겨갔지만 갈피를 못 잡았던 나의 10대



 언제부턴가 고모와 언니가 아빠와 내가 사는 집에 살게 됐다. 언니는 할머니가 쓰던 방에 잤고 나는 내 방에 잤고 고모는 엄마와 아빠가 쓰던 방에 잤고 아빠는 거실에 잤다. 그때 엄마는 뭘 하고 있었을까? 굳이 상상하고 싶지 않으니 넘어가겠다. 아빠는 여전히 슬펐고 고모도 슬펐다. 언니도 슬펐고 나도 슬펐다. 슬픈 네 명이 모여 사는 슬픈 집이 되었다. 벌레는 어김없이 나타났지만 나는 고모 덕분에 맛있는 밥을 먹었고 휑하던 집안에는 대화가 돌아다녔다. 우리는 가끔 거실에 모여 밥을 먹고 아빠와 고모가 술을 마시면 언니와 나는 방에서 강아지를 예뻐하기도 하고 강아지가 뀐 방귀 냄새를 맡으며 한바탕 웃기도 했다가 화장을 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을 텐데.


 그 당시의 또다른 기억. 나는 언젠가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요리학원을 다니고 있었고 레시피책을 모으고 있었다. 나는 슬픈 아빠와 슬픈 고모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고 들깨수제비도 만들고 파스타도 만들었는데 고모와 아빠는 우와, 우와, 하며 맛있다며 먹어 주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맛이 그렇게 없었던 것 같다.



 고모가 방안에서 소리내서 엉엉 울던 날 아빠는 거실에서 혼자 술을 마시며 빨간 얼굴로 아, 듣기 싫다, 듣기 싫다, 했고 나는 고모의 슬픔과 아빠의 속내를 들으며 아, 슬픔은 듣기 싫은 거구나 생각했다. 우는 소리는 듣기 싫구나. 나는 고모가 안쓰러워서 위로하고 싶었으나 문이 굳게 닫혀 있기도 하고 만약 내가 저토록 슬프다면 타인이 내 슬픔을 지나쳐 줬으면 싶을 듯해 소파에 앉아 가만히 슬픈 아빠와 슬픈 고모의 소리를 담았다. 그래서 미정 언니도 슬펐다. 언니는 집 밖을 나가 엉엉 울었고 집에 들어와 아빠와 미정 언니는 한바탕 싸웠다. 두 사람이 왜 싸웠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때는 아빠가 잘못했어. 얘기를 들으며 나는 아빠가 심하다 생각했고 그렇다면 나는 끼어들어 언니를 보호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글렇게 하지 못했을까.  잘못 끼워진 퍼즐 같다. 언니는 가끔 집에 친구들을 데리고 왔고 나는 머쓱하게 안녕하세요 하고 방에 휙 들어가 버렸다.


 나는 멋있는 노래를 듣는 언니가 대단해 보였고 자신에 어울리게 사진을 찍는 언니가 근사했고 밝고 쾌활한 언니가 좋았다. 물론 슬픈 언니도 좋았다. 그냥 언니가 좋았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슬픈 집에서 슬픈 나와 슬픈 아빠 둘만 살게 되었고 엉엉 우는 소리도 줄어들었다. 미정 언니와는 가끔 연락을 하며 지냈지만 그때쯤 나는 아주 슬펐던 시절이라 모두와의 연락을 피하고 지냈던 것 같다. 엉엉 울며 아주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었던 안쓰러운 시절. 내가 아주 거대해지고 고모와 아빠와 언니가 작아져서 품어 주고 싶다. 내가 거대하고 폭신한 오리가 되어서 더없이 폭신한 안정감을 주고 싶고 왠지 모르게 슬픔이 사라진 듯한 착각을 주고 싶다. 내가 엄마가 되고 싶다. 엄마가 되어서 괜찮다며 엄마가 있지 않냐며 다독여 주고 싶다. 엄마가 된 나는 또 엄마의 엄마가 되고 싶다. 슬펐지만 엄마도 슬픈 엄마였지 않냐며 괜찮다고 뽀뽀해 주고 싶다. 슬픈 엄마는 뽀뽀를 좋아했다.



 슬픈 나는 슬픈 아빠와 슬픈 집에 사는 게 싫어져서 슬픈 엄마와 행복한 새아빠가 있는 애매모호한 집에 살기로 했다. 고등학생 때의 큰 결심이었다. 슬픈 두 부모님은 내 거주를 옮기는 것 때문에 법정에서 만났다고 했다. 아빠는 엄마가 돈 때문에 나를 위하는 척하는 거라 했고 엄마는 아빠를 미워하고 욕했다. 나는 가만히 서서 슬픈 아빠와 슬픈 엄마를 변호했다. 행복한 새아빠에게는 언니 하나와 오빠 둘이 있었다. 새아빠는 아무 생각 없이 일상을 보내는동안 슬픈 엄마는 자주 나를 데리고 목련을 따러 다녔다. 엄마는 그때 빌라에 살고 있었는데 바로 옆에 목련 나무가 있는 주택이 있었다. 엄마는 목련을 따면 주택에 사는 사람이 자주 나와서 꾸짖었다. 그래도 엄마는 계속 숭덩 떨어진 목련을 줍고 가지에 매달린 목련을 따고 자주 눈치를 보았다. 나는 옆에서 그러지 말라고 했고 엄마는 괜찮다 했다. 뭐가 괜찮은 걸까. 엄마는 소리 없이 우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고 내가 잔말없이 목련 따는 엄마를 도울 수 있게 됐을 때 쯤, 나도 소리 없이 우는 법을 터득했다. 엄마를 보지 못하고 살아온 지난 세월이 생각나 아주 서럽게 울었는데 행복한 새아빠는 우는 소리가 듣기 싫다며 소리를 질렀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 무서워서 지금도 눈물이 날 것 같다. ( ㅜㅜ) 나는 울지 않으려고 허벅지에 손톱을 박아가며 엉엉 소리를 삼켰고 덕분에 눈물만 또르르 흘릴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새언니는 새아빠를 좋아하지 않았다. 언니는 위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언니는 엄마에게 잘대해 줬고 스스럼 없이 엄마라고 부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언니는 아빠가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했고 나는 언니가 좋았다. 언니는 화장을 잘했고 항상 예쁜 옷을 입고 다녔다. 머리 손질도 잘했다. 나는 새언니도 멋져 보였는데, 언제부터 언니는 엄마도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했다. 엄마와 새아빠가 언니의 돈을 어쨌다나…. 대출을 어쨌다나…. 언니는 울었고 나는 슬픈 엄마의 얼굴이 생각났다. 엄마가 그렇게 따던 목련이 생각났고 엄마의 껌 씹는 소리가 듣기 싫다며 윽박지르던 새아빠의 찡그린 얼굴이 생각난다.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나는 슬픈 언니가 안쓰러워서 언니의 말에 공감했다. 어떻게 그러냐고. 진짜 이상하다고. 이상하다고 했지 나쁘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살게 되었는데 그때 마침 새언니도 서울에 취직을 하게 되어 함께 살기로 했다. 아주 작은 오피스텔 원룸이었다. 언니가 월세를 감당해 주었고 나는 바닥에서 자고 언니는 침대에서 잤다. 우리는 자기 전에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함께 술을 마시러 가기도 했다. 독립된 공간 없이 생활하며 언니도 많이 불편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 정말 언니한테 너무했다 싶다. 이런저런 불만이 가득했는데 그게 대체 어떤 불만들이었을까 싶고…. 언니는 건강에 좋다며 홍삼도 먹이고 꼭 비타민을 챙겨 먹으라는 말도 해 줬는데. 같이 웃긴 영상을 찍으며 장난치기도 했는데. 그때 나는 아침 5시에 일어나고 밤 12시에 잠드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었다. 무식한 카페 알바 때문이었다. 너무 졸리고 피곤하고 이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근데 왠지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압박감이 있었고, 그날따라 언니는 자정이 넘었는데도 노래를 듣고 있었고 나는 그게 못마땅했다. 이렇게는 못 살겠다는 생각에 나는 슬픈 아빠에게 자취를 선언했고 엄마에게도 자취를 선언했다. 왜 그러냐는 슬픈 부모에게 언니와 나는 생활 습관이 맞지 않는다며 이러저러한 일들을 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말했고…. 나는 다시 내가 언니한테 왜 그랬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 잘못 끼워진 퍼즐 같다. 또.


 내가 자취를 하는 게 확정이 되고 언니의 집을 떠나기 며칠 전 언니는 슬픈 언니가 되었다. 언니는 잘 챙겨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울었고 나도 울었던 것 같다.


 나는 집값이 싸다며 부산까지 소문난 신림에 살게 됐고 그 이후로도 언니와 나는 이따금씩 만났다. 가끔 연락을 주고받다가 연락은 뜸해졌고 엄마가 갑자기 연락두절이 됐을 때 연락이 왔다. 엄마 연락 되냐고 물었고 나도 엄마가 연락이 되지 않았지만 슬픈 엄마가 슬픈 엄마인 게 하루이틀인가 싶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언니는 아마 더 슬퍼졌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슬퍼졌다면 나는 누구를 바라보아야 할까. 시선을 어디 두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나는 자주 바닥을 본다. 나는 그때도 바닥을 보고 있었다.  



 새아빠도 어느순간 슬퍼지고 모두가 아주 슬픔에 진저리를 칠 때…. 엄마는 새아빠와의 이혼을 결심했고 나는 아주 잘생각했다며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엄마는 새아빠와 이혼했고 새아빠는 슬픔에 젖어 자주 나에게 전화했다. 그래도 한번 아빠는 영원한 아빠이지 않냐는 말에 나는 네, 했으면서도 다시는 연락하지 않고 있다. 이때쯤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슬퍼지는 걸까…. 나는 양처럼 슬픔을 몰고 다니는 기운 좋지 않은 사람인 걸까…. 나는 실패한 걸까…. 나는 장마 같은 사람…. 나는 잘못으로 똘똘 뭉쳐진 사람….


 엄마와 새아빠가 이별하고 새아빠가 내 아빠가 아니게


된 순간부터 언니와의 연락도 끊겼다. 나는 더이상 언니를 볼 면목이 없어졌고 만난다고 해도 자연스럽게 대할 자신이 없다. 죄책감이 남아 있어서 언니를 만나도 나는 계속 바닥을 바라볼 것 같다. 그건 언니에게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아직 그 정도의 사람인가 보다. 슬프게도.



 이 잘못 끼워진 퍼즐을 쓰면서 든 생각은 나는 어쩌면 언니들을 만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지만 내 삶이 일직선이라면 나는 보드게임의 말처럼 한 칸씩 나아가고 나의 근사한 언니들이


어디선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나에게 아직 쓰지 못한 근사한 언니들의 기억이 많다. 이제는 너무 적막한 밤이 되어 버리기도 했고, 너무나도 슬퍼져서 오늘은 언니들을 그만 쓰고 싶다.


 퍼즐을 다시 잘 맞춰 보고 싶을 때 언니들을 다시 써야겠다.



 언니들은… 어디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슬픈 얼굴을 한 언니들이 자꾸만 웃는 얼굴을 얼핏 비추며 나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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