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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빛나 Feb 21. 2018

사월 이야기



새학기가 시작되었다. 선생님의 나긋한 목소리를뒤로 멍하니 창밖에 시선을 던졌다. 발갛게 흐드러진 동백과 구호를 외치며 뛰는 아이들이 시선 끝에 걸렸다. 멀리서 보니 체육복이 노래서 꼭 동백 꽃술 같다. 대형에서 한참 뒤처진 아이가 있다.벙긋도 하지 않는 걸 보니 가쁜 숨을 고르는 데 열심인 듯하다. 꽃잎마냥 남실거리며 뛴다. 혹여나 놓칠까 뒷모습을 쫓다 웃음이 터질 뻔했다. 노트 끝자락을 매만지던 손을 올려다 굽은 입꼬리에 얹었다. 아직은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입부터 등까지 둥글게 말렸다. 창문을 닫으려 무심히 손을 뻗다 그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바람이 아이의 머리칼을 매만지고 있었다. 황급히 문을 닫고서 노트를 바라보았다.

창문이 닫혔음에도 봄내음은 진동했다.

친척 결혼식에 간다. 봄에 신으려 산 새 신을 꺼냈다. 급하게 발을 구겨넣으며 머리를 빗는 아빠를 불렀다. 적어도 10분 전에는 출발했어야 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좀처럼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애꿎은 구두 끝만 노려보았다. 참 예쁜 구두다. 흠하나 없이 반짝거렸다. 몇 번을 더 부르고 나서야 옷 매무새를 다듬으며 나왔다. 신발장에서 아빠의 구두를 꺼냈다. 갈색의 가죽 구두였다. 발이 들어가자 뒤축이 힘없이 꺾인다. 여기저기 새겨진 상처가 보인다. 쪼그려 앉아 끈을 묶어 주었다. 가까이서 보니 헌 곳도 있다. 매듭을 단단히 하며 새 신을 사는 게 좋겠다 말했다. 말없이 한숨을 푹 쉬며 앞보강을 툭툭 턴다. 아빠의 깊은 숨에서 뿌연. 연기 냄새가 났다.

무릎이 까졌다. 이어달리기 계주 연습 실수로 넘어졌다. 얼얼한 게 꼭 데인 것 같다. 어찌할 바 모르는 손들을 향해 활짝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고개를 돌리자 마자 울음이 치밀었다. 혹여나 수업에 방해가 될까 발꿈치를 띄웠다. 숨소리마저 소란스러워지는 복도다. 5반 앞을 지나가다 친구와눈인사를 했다. 복도 쪽 자리의 아이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 아이다. 볼에는 눌린 자국이 붉게 남아 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선생님이 부르는 소리에 겨우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상처가 화끈거리는 것도 잊고 달렸다. 눈가가 건조해졌다.

벚꽃이 졌다. 며칠 전만 해도 하늘 위에 자리하던 게 어느샌가 땅에 수놓아져 있다. 봄이면 온통 분홍빛으로 물드는 거리다. 꽃잎이 밴 자리를 피해 걷는다. 꽤나 낮은 곳까지 내려온 나뭇가지에 아직 시들지 않은 벚꽃이 매달려 있다. 손을 내밀다 이내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서 꽃잎을 세며 걸음을 옮긴다. 미적지근한 바람이 붐과 동시에 꽃잎이 휘날린다. 엉키기도 하고 맞닿기도 하는 게 꼭 무도회 같다. 몇 초간의 무도회는 끝나고, 다시금 산들바람이 불어온다. 꽃잎이 남실거린다. 저 멀리 시선을 던지고 멈추어 섰다. 거리는 온통 분홍빛으로 번진다. 남실거리는 것은 꽃잎 뿐이었다.

4월이 되었다. 친구들과 무얼 얘기해도 웃음이 나오는 달이다. 교정에는 벚나무가 참 많다. 발갰던 동백은 고개를 묻고 잠들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 뒤를 이어 분홍빛 벚꽃이 번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비처럼 꽃잎이 쏟아진다. 이따금씩 위를 바라보며 간지럽게 웃었다. 친구의 속눈썹에 벚꽃이 앉았다. 낙엽이 굴러가는 모습만 보아도 웃는다는 말이 떠올라 와르르 무너지며 웃었다. 바람이 살랑이며 꽃잎을 실어다 주었다. 그 사이로 고동빛의 머리칼이 보였다. 바람이 아끼는 아이. 걸음걸이만 봐도 알 수 있다. 걸을 때도 남실거린다.벚꽃이 화하다.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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