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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진오 Apr 28. 2017

마지막 회식

#18

 파트장님과 면담이 진행된 이후 곧이어 팀장님과 면담이 진행되었다. 물론 팀장님께서 한동안 나를 피해 다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단순히 나만의 착각 이리라.


'퇴사하고 계획은 있는 거니?'

'아무 계획도 없이 나가면 너무 위험하니 회사 다니면서 천천히 찾아보는 게 어떠니?'와 같은 


예상했던 회유와 권유를 비교적 가볍게 넘기고 나는 무사히 팀장님과의 면담을 마무리했다. 이제 남은 것은 인사시스템에 퇴사 신청을 하는 것뿐이었다. 퇴사를 신청하는 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예상 퇴직금을 조회할 수 있는 카테고리가 있다. 그동안 회사를 다니며 힘이 들 때면 예상 퇴직금 조회를 수도 없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언제나 생각보다 별로 안 되는 퇴직금에 실망만 할 뿐, 당연히 퇴사 신청 버튼을 누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예상 퇴직금이 아니라 실제 수령액을 확인해야 했고, 정말 퇴사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이 조금씩 더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시스템에 입력을 하고 나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인사팀에서 개별적으로 연락이 왔고 나는 몇 가지 절차에 따라 서류를 제출하고 인사 담당자 면담까지 모두 마무리했다. 퇴사 프로세스를 따라 하나하나 진행해 나가다 보니 왠지 나의 회사 생활이 프로세스로 시작해서 프로세스로 끝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니던 기업이 비교적 큰 규모의 기업이라 모든 일이 항상 프로세스처럼 정형화되어 있었다. 입사 전에는 그런 프로세스가 갖춰져 있는 것이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업무를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고 실제로 좋은 프로세스는 더 나은 성과를 창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입사를 하고 현업에 종사하다 보니 참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프로세스 또한 많다는 것을 느꼈다. 흔히 말하는 프로세스를 위한 프로세스가 만들어질 때가 많았고 누군가의 성과를 만들어 주기 위한 의미 없는 과정들이 생겨날 때도 적지 않았다. 흔히 일상에서 어떤 물건을 결제 하기까지 끊임없이 'Active-X' 가 우리를 괴롭히듯이 대기업 프로세스들도 종종 그런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그리고 퇴사를 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회사의 거대한 시스템이 만들어 놓은 프로세스 안에서 '승인 완료' 혹은 '결재 완료'를 기다리고 있다. 최종 결재자의 승인 버튼 클릭 한 번이면 나의 퇴사는 완벽하고 깔끔하게 프로세스 상에서도, 현실상에서도 마무리되리라. 


퇴사를 하게 된다면 이 거대한 프로세스의 틀 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갈까? 혹은 질서 없고 혼란스러운 현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체계적인 프로세스를 그리워하게 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여기서 벗어나는 순간 알게 될 테지.


시스템 속에서의 퇴사 절차는 거의 마무리되어감과 동시에 시스템 바깥 세계에서도 빠질 수 없는 하나의 프로세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곧이어 한 통의 메일이 날아왔다.


"[팀 회식 공지] 퇴사자 및 전배자를 위한 팀 회식 공지드립니다."


누구나 그러하듯 회식을 좋아하는 회사원들은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술을 즐겨하는 편이긴 하지만 회식 자리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회식이 끝나고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걸어서 갈 수 있는 기숙사도 아니고, 택시를 타고 갈 배짱을 부릴 수 있는 거리도 아닌, 넉넉히 잡아 2시간은 걸리는 서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 어쩔 수 없이 술을 과하게 먹은 날에는 기숙사에 사는 동기의 방에 신세를 지곤 했는데,


 아무래도 이번 회식은 마지막으로 동기의 방에 또 한 번 신세를 져야 할 듯하다. 


가는 사람이 있으면 오는 사람이 있는 법이라고 했던가, 퇴사를 하는 나와는 정반대의 입장인 새로 우리 팀에 전입을 오시는 분들이 꽤 있었다. 떠나는 사람에 대한 아쉬움과 새로 온 사람을 위한 환영이 함께 공존하는 조금은 모순되고 어색하기도 한 마지막 회식 자리가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총무를 맡고 있는 평소 친하게 지내는 선배가 기어이 퇴사자의 한마디를 듣겠다며 나를 자리에서 일으켰다. 뭐라고 이야기를 할까, 처음 양복을 차려입고 면접을 보러 온 순간부터 그동안 회사에서 지내온 날들이 하나하나 머릿속을 스쳐갔다. 생각을 곰곰이 해보니 힘들긴 했지만 매일 매 순간이 괴롭기만 하지는 않았다. 즐거웠던 순간도 있었고 보람을 느꼈던 순간도 있었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 모든 순간을 깔끔하게 정리해서 조리있게 이야기할 언변과 말재주가 나에게는 없었기에, 나는 그저 그동안 부족한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셔서 감사했다고, 모두가 바쁘지만 한번 사는 인생 행복하셨으면 좋겠다는 다소 짧은 이야기로 3년 8개월여간의 회사 생활의 소회를 밝혔다.


많은 직장인들이 주변 상사를 보며 본인의 5년 뒤 혹은 10년 뒤의 모습을 상상할 것이다. 나 역시 주변 상사들을 바라보며 나의 먼 훗날의 모습을 상상했었고 죄송한 이야기지만 그 미래의 내 모습이 나에게는 썩 유쾌하진 않았다. 그 이유는 단순히 업무적인 능력이나 개인적인 성격 때문이 아니다. 가장 중요했던 것은 평소 그분들의 모습이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회사 안에서의 그분들의 모습만 보고 내가 감히  행복을 판단하는 것은 경솔할 수 있으나 적어도 그동안 내가 보고 느끼기로는 조금의 행복한 모습도 회사 안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현실은 낭만적이지도 달콤하지도 않다.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이 

진짜 인생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 안에서 행복이라는 감정을

찾는 것은 어쩌면 로맨틱 드라마보다도 

비현실적이고 터무니없는 이야기 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조금은 그들이 

소소한 행복을 찾아가기를

최소한 행복이 '사치'라고 느끼지는 않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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