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의 발견
이번 겨울은 지독히도 길었다. 과장 조금 보태면 일 년의 반은 겨울이었던 듯 싶다. 마치 독감처럼 떨어질 듯 떨어질 듯하면서도 끈질기게 붙어 있더니 드디어 반년이 지나서야 슬슬 이 땅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다. 그래서였을까, 요 며칠 아낌없이, 팡팡 내리쬐는 볕이 꼭 꿀처럼 느껴졌다. 노랗고 쨍한 것이 머리를 타고 온 몸으로 흐르는데, 볕의 맛이 꽤 달고 진했다.
그렇게 한참 광합성을 하다가 문득 식물이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을 흠뻑 머금은 이파리가 볕에 비춰졌을 때 초록의 색을 더 화려하게 뽐내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아주 싱그러워질 것 같았다. 그래서 어느 날 좋던 날, 친구의 결혼식을 다녀 온 뒤 찾은 한남동 꽃집에서 화분 몇 개를 골랐다. 애플민트, 바질, 부자란. 민트와 바질은 요리에 쓸 요량으로, 부자란은 신비로운 보랏빛을 가진 이유로 고른 것이었다. 그렇게 허브를 산 이후, 연신 밥상에 샐러드를 올렸다. 바질 잎 몇 장만으로도 샐러드 보울에는 한 가득 향기가 퍼졌다. 냄새만 맡아도 배부를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토마토, 오렌지, 노란 파프리카에 엑스트라버진 올리브 오일을 뿌린 과일 샐러드를 즐겨 먹었는데, 여기서 의외의,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됐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어느 날, 냉장고에서 꺼내 놓은 토마토를 깜빡한 채 그대로 부엌 작업대에 방치해 버렸다. 다시 냉장고에 넣는 것을 잊고 말았다. 그런 뒤 3일. 샐러드를 만들 요량으로 재료들을 다듬다가 상온에 방치된 토마토가 불현듯 떠올랐다.
아차차. 네가 거기에 있었지
방치해 둔 토마토에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을 가지며 망가지기 전에 당장 샐러드 재료로 쓰기로 했다. 그리고 잘랐는데, 토마토가 아주 빨갰다. 농염하게 숙성되어 있었다. 냉장고에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달아보였다. 냉장고에 보관해 둔 것은 그에 비해선 말도 안 되게 옅은 핑크. 더 단단했고 맛도 덜했다.
그렇지. 이게 바로 후숙이지. 무심코 방치해둔 동안 토마토는 혼자서 볕을 쬐면서 느긋하게 숙성하고 있었던 거다. 볕을 충분히 머금으며 더 달고 빨갛게 성장하고 있었던 거다.
기특한 토마토
그러니까, 이 일련의 과정은 만물을 성장하게 하는 볕의 힘과 몸의 깨달음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후숙의 과정을 사실 몰랐던 것도 아니다. 머리로는 숙성의 매커니즘을 공식처럼 외우고 있었는데 몸은 귀차니즘의 온상지라, 겪어보지 못한 것이 많은 만큼 머리보다는 훨씬 무식했다. 그리고 비로소 이렇게 겪고 나서야 절실히 깨닫게 된다. 자연은, 생명은 이렇게 숙성이 되는 것이었지. 뜨거운 볕의 힘으로, 느긋한 시간의 힘으로. 아주 작고 대단치 않은 토마토의 숙성의 과정을 접하니 좀 감격스러워졌다. 태양과 시간의 위력, 몸으로 배우는 것의 힘을 새삼 느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토마토에게서 또 하나를 배웠다.
사람과 음식 사이, 그 짧고도 영원한 이야기를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