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나빌레라>가 일깨운 노인 문화예술교육 칼럼을 읽고
아르떼 웹진을 보다
조은아_피아니스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님의 칼럼을 퍼온다.
드라마 <나빌레라>를 보면서 내 마음에 와 닿았던 명대사들과 그것이 불러 일으켰던 생각들이 너무나 나의 것과 일치하였기에...
그리고 이 드라마가 전해주었던 "나를 위한 시간을 갖는것, 해보고 싶은 것을 해보는 것,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라는 메세지 덕분에, 나는 중3, 4월에 예고입시에 도전해보겠다는 큰 아이를 응원해주는 엄마가 될 수 있었다.
“할아버지, 무용수가 되기에 너무 늦었다는 거 알고 있죠? 그런데 발레가 왜 하고 싶어요?”스물세 살의 발레리노 채록은 발레를 배우겠다며 다짜고짜 찾아온 칠순의 노인 덕출이 영 이해되지 않는다. 이 스튜디오에선 오디션을 몰입해 준비해야 하니 문화센터에서 편하게 배우시라 몇 번을 에둘러 거절했는데도 할아버지는 물러섬이 없다.
“곱게 늙어야지,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덕출이 숨겨놓은 발레복을 발견한 아내는 남편의 눈앞에서 발레복을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자식들도 거세게 항의한다. 집에서 TV를 보시고 엄마랑 등산이나 다니시지 왜 남사스럽게 발레냐며 그러다 다치시면 우리가 고생 아니냐며 뜯어말린다.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직장에서 은퇴한 덕출은 하루가 너무 길어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노년을 소일하고 있었다. 월급쟁이 노동에서 해방되었지만,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세계가 자신을 빼고 돌아가는 세상이 된 듯 자꾸 소외된 느낌이 든다. 쓸모를 다한 존재로 이렇게 살다 끝나는 것일까. 무력한 그를 일깨운 건 요양병원에서 시들어가고 있는 친구의 조언이었다. “지금이다 덕출아. 넌 아직 안 늦었어. 다리에 힘 있고 정신 말짱할 때 하고 싶은 것 있으면 다 해봐.”
덕출은 어려서부터 꿈꿨지만 생계를 위해 남몰래 접어 두었던 발레의 꿈을 처음으로 펼쳐든다. 그리곤 새까맣게 어린 발레리노를 찾아가 이렇게 설득한다. “저는 한 번도 하고 싶은 걸 해본 적이 없어요. 이제야 겨우 시도하려는 겁니다. 나도 잘 알아요. 내가 늙고 볼품없는 노인이라는 거. 그래도 하고 싶어요. 져도 좋으니까 시작이라도 해보고 싶어요.” 덕출은 사무치게 깨닫고 있었다. 살아보니 삶은 두 번이 아니라 딱 한 번 뿐이라는 걸. 어렸을 땐 아버지가, 지금은 가족들이 발레를 반대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그에게 시간이 얼마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지만, 덕출은 알츠하이머 환자였다. 그러니 기억이 휘발되고 몸이 굳어버리기 전에 ‘한 번은 날아오르고 싶은 꿈’을 발레 <백조의 호수>를 통해 실현하려 한다.
드라마 <나빌레라>는 이처럼 삶의 끝자락에서 마지막 열정을 깨달은 일흔 노인의 삶을 담고 있다. 주인공 덕출을 연기한 배우 박인환은 실제 6개월 동안 발레 레슨을 받았다. 배역을 받아들이기까지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이때 아니면 언제 해보겠냐.’는 마음이었다고 한다. 이제껏 살면서 해보지 않은 일에 도전하는 것은 삶의 전환을 위한 한 방법이다. 그중에서도 합리적이거나 생산적이지 않은 예술의 방식으로 딴청 부릴 수 있을 때, 우리는 내 몸에 잠재된 다양한 정체성을 발굴하게 된다. 칠순의 덕출에게 발레는 개인의 욕망과 감각을 발견하는 뜻깊은 도전이었다. 예술은 몸을 움직여 놀이의 본능을 일깨우고 내면의 자아를 밖으로 표현하게 한다. 덕출도 발레를 배울 때만큼은 두 눈을 반짝이며 아이처럼 순수한 기운을 내뿜는다.이 드라마의 독특한 미덕은 예술교육의 상호작용에서 발견된다. 덕출의 선생은 스물세 살의 발레리노 채록이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는 관계가 깊어질수록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지 분명치 않다. 덕출은 복잡한 가정사로 방황하는 채록의 일상을 따뜻이 돌보며 날개 꺾인 그의 꿈을 응원하고 지지한다. 부상으로 오디션을 포기해야 하는 손자뻘 선생에게 “다음은 있다, 뭐든 될 수 있고, 뭐든 할 수 있다.”라고 격려하거나, 채록을 괴롭히는 무뢰한을 막아서며 “크게 날아오를 사람”이라 보호하기도 한다. 나이가 들수록 편견과 고집에 사로잡힐 법하건만 외려 겸손하고 유연하다. 채록의 내밀한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귀 기울여 들어주고 그의 꿈을 지탱해 준다. 청춘들이 겪는 치열한 경쟁과 좌절이 기성세대 탓이라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어르신이라 부르지 말아요. 나 어른 아냐. 그깟 나이가 뭐 대수라고. 저는요. 요즘 애들한테 해줄 말이 없어요. 미안해서요. 열심히 살면 된다고 가르쳤는데, 이 세상이 안 그래.” 할아버지와 손자뻘, 세대 간 격차를 허물면서 서로의 삶을 보듬어 위로하는 장면은 교육 현장에 만연한 일방향의 사제 관계를 되돌아보게 한다.
나를 위한 시간, 잊히지 않는 몸의 기억발레를 배우기 전 덕출은 다른 노인들처럼 넘치는 시간을 어떻게 소일해야 모를지 난감해했었다. 그러다 채록을 만나 발레를 배우고부터 시간이 더없이 소중해졌다. 게다가 알츠하이머로 점점 흐려져 가는 기억에서 온전히 자신을 인식하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갈급했다. 덕출의 치매 증세를 감지한 채록이 그의 가족에게 알려야 할지 고민할 때, 친구는 이렇게 조언한다. “골키퍼 주제에 골문을 지켜야지 공을 왜 네가 넣냐. 막 불안해 미칠 것 같지? 그럼 소리 질러서 응원해줘. 막 박수 쳐줘. 그럼 된 거야.”
덕출은 채록의 도움을 받아 꿈에도 그리던 ‘백조의 호수’ 무대를 준비한다. 희미해져 가는 기억으로 불안한 두 사람은 서로를 다독이며 지탱한다. “할아버지, 몸은 다 기억해요. 어디 안 가고 할아버지 안에 다 있어요.” “걱정 마, 채록아. 머리는 바보가 되어가지만, 몸이 기억하도록 하루도 연습을 안 쉬었어.” 드디어 무대에 오르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고 몸이 굳어버린 덕출에게 채록이 끊임없이 말을 건넨다. “할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건 뭐예요?” “발레”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요?” “백조의 호수” “할아버진 지금 가장 좋아하고 하고 싶었던 걸 하는 거예요. 할 수 있어요, 할아버지.”
두 사람이 함께 날아오른 백조의 호수로 가슴이 먹먹해져 기나긴 여운을 음미할 때, 드라마는 다음의 엔딩 크레딧으로 노년의 예술교육을 재차 일깨워 준다.“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일흔의 덕출이 그랬듯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