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ke #09. <폭스캐처>
마크 슐츠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다. 링 밖의 메달리스트의 삶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레슬링 따위에는 관심이 없어 보이는 아이들을 앞에 두고 강연을 한다. 그리고 받는 돈은 달랑 20달러, 그마저도 같은 레슬링 금메달리스트인 형, 데이브를 대신한 자리다. 식사는 늘 혼자다. 차 안에서 햄버거로 끼를 때우거나, 인스턴트 음식으로 해결한다. 먹는다기 보다 밀어 넣는다. 그런 그가 존 듀폰으로부터 솔깃한 제안을 받는다.
존 듀폰은 우리로 치면 재벌 3세 정도 되는 인물이다. 화학산업으로 성공한 듀폰 가문의 상속자다. 마크에게 ‘88 서울 올림픽’에서 함께 금메달을 목표로 하자는 제안을 한다. 마크는 데이브와 함께 ‘폭스캐처’ 팀에 합류할 것을 권유하지만 데이브는 이를 거절한다. 존은 약속대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연봉부터 훈련소, 집 모두를 제공한다. 거듭되는 승리는 존과 마크는 서로의 콤플렉스를 밀봉시킨 채 가까워진다. 존은 스스로 마크의 멘토가 되기를 자청한다. 함께 행사에 참여하고, 이발을 해주는 등 둘 사이는 마치 아버지와 아들 관계처럼 그려진다.
사실, 존과 마크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열등감이다. 존은 어머니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한다. 레슬링 대회에서 받은 트로피를 어머니에게 자랑하지만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훈련장에 존의 어머니가 방문한 장면은 존의 열등감을 강하게 부각한다. 어머니를 발견하자마자 존은 선수들을 집합시킨다. 그리고는 기본기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는다. 직접 파테르 자세를 취하면서 어머니를 응시한다. 자신을 인정해 달라는 욕구는 몸 전체에 강하게 힘을 주듯이 팽창한다.
마크의 열등감은 형, 데이브로부터 온다. 함께 훈련하지만 자신을 보호해주는 형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한다. 레슬링 연습장에서 마크는 자신을 꽉 움켜쥔 데이브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순간 마크의 눈가에 눈물이 번진다. 마크의 독립된 존재 인정받기를 내면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장면이다. 마크의 집에는 <델라웨어 강을 건너는 워싱턴>이 걸려있다. 미국 독립의 영웅인 워싱턴의 그림이 그의 집에 걸려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존과 마크의 열등감은 모두 아버지의 부재로부터 출발한다. 아버지와 아들 역할은 둘 모두에게 콤플렉스를 덮어두기 위해 필요한 장치였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한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마크에게 존은 폭력을 휘두르고 만다.
존은 틀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데이브를 폭스캐처 팀으로 불러들인다. 데이브는 자상한 아버지, 능력있는 레슬링 코치, 나름의 형의 역할을 잘 수행한다. 자신의 역할을 잘 이행한다는 것은 타인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일이기도 하다. 데이브 존재는 존으로 하여금 멘토가 되고자 하는 방해 요소다. 마크는 결국 88년 서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걸지 못한다. 존은 멘토로서 인정받지 못한다.
감독은 존이 데이브에게 총을 쏜 사건을 설명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사건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쉬운 선택을 피한다. 대신 인물에 집중한다. 세 인물을 둘러싼 사건을 하나하나 쌓아 올리면서 조밀하게 관찰한다. 때문에 호흡은 길지만 가쁘다.
단순히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전작인 <머니볼>에서도 그랬듯이, 배넷 밀러 감독은 개인의 이야기를 구조적 문제로 확장하는 힘을 가졌다. 영화는 곳곳에서 등장인물이 개인의 목적과 국가의 목적을 동일시하는 장면을 담는다.
존은 폭스캐처 팀에게 끊임없이 미국의 훌륭한 시민이 되라면 애국심을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마크와 가까워질 때, 스스로를 ‘eagle’이라고 부르기를 바란다. 독수리는 미국을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존의 집 구석구석에서 발견되는 성조기와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도 같은 맥락이다. 애국심은 미국이라는 국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을 숨기기 좋은 도구다. 이러한 애국심과 폭력은 영웅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있다.
이런 지점에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인상적이다. 금메달 획득해 실패한 혹은 형을 사고로 잃은 마크는 이종격투기 선수로 무대를 옮겼다. 무대에 오른 그를 향해 관중이 외치는 함성은 ‘마크 슐츠’가 아닌 ‘USA’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