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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군 Nov 29. 2016

그리고 맥주 한 잔

마이 볼, 마이 파더

 쓰러지지 않는 기억의 도미노가 있다. 매일 밤, 침대에 누워 떠나는 기억의 여정은 항상 그 앞에서 멈춰 서고 만다. 힘껏 밀어도 도통 넘어갈 생각을 않는다. 2009년 10월 24일의 일이다. 그해, 프로야구의 결승전인 한국시리즈 7차전이 열리던 날이었다. 아빠의 고향 팀이자, 내가 응원하는 팀이 12년 만에 한국시리즈 무대에 선 날이기도 했다. 그 날 따라, 집에는 아빠와 나 단 둘이었다. 나는 소파에 기댄 채, 아빠는 바닥에 앉아 TV를 응시했다. 거실의 TV 앞에 둘이 함께 앉은 일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경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는 나에게 맥주 한 잔을 하겠냐는 제안을 해왔다. 아빠는 종종 집에서 맥주를 즐기곤 했다. 가끔, 아주 가끔 나에게 한잔을 권하기도 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집에서 맥주를 마셔 본 적이 없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나는 고개를 저었고, 아빠 홀로 맥주를 마셨다.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아빠와 나는 단발적이지만 제법 많은 이야기를 했다. 야구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는 아빠의 고향의 이야기이기도 했으며 나의 시골에 대한 이야기였다. 또 아빠의 청춘이자 나의 유년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2학년, 한 쌍의 글러브를 샀다. 길을 들인다며 작은 손으로 딱딱한 가죽을 한참이나 주물러댔다. 그 날부터, 주말에는 새로운 일과가 생겼다. 아빠와 함께 캐치볼을 하기 시작했다. 매주 공원으로 향했다. 잡는 공보다 놓치는 공이 많았다. 뒤늦게 깨달은 사실이지만 아빠에게 글러브는 손을 짚어 넣기에 터무니없이 작았다 때문에 둘 모두, 이리저리 공을 주우러 뛰어다녀야 했다. 그 무렵 아빠와 나의 주말 풍경이었다. 우리의 시간은 여전히 그곳에 멈춰 있다.

 나 역시 글러브에 억지로 손을 끼워 넣어야 할 무렵, 우리가 함께 캐치볼을 하러 공원으로 가는 일도 사라졌다. 일 년 중주 말을 함께 보내는 날도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저녁식사를 함께하는 일도 손에 꼽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집 안에서는 방의 경계가 뚜렷해졌다. 각자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냈다. 거실의 등은 항상 가장 먼저 꺼졌다. 어느 순간 짐짓 무뚝뚝한 아들이 되어있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중>



 “와 아아아 아”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동점 홈런이 터졌다. 한국시리즈 7차 전답게 야구 경기는 꽤나 흥미진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도망가고따라 잡히고 가 반복되는 경기였다. 아직 해가 있었을 때, 시작된 경기는 어느새 늦은 저녁을 향해가고 있었다. 어둑어둑해졌다. 밤이 깊어졌다. 어느 스포츠 영화 속의 재미없고 시시한 이야기처럼 9회 말로 향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9회 말, 끝내기 홈런이 승부를 갈랐다. ‘아홉 수를 푸는데 꼬박 12년이 걸렸습니다.’라는 캐스터의 멘트가 기억 속에 또렷하다. 나는 담담히 좋아했다. 그리고 그 날, 홈런을 친 선수가 그라운드를 한 바퀴 도는 동안, 관중들의 함성이 브라운관 너머를 들리는 동안, 아빠는 ‘오늘따라 맥주가 맛있다.’라는 말을 반복해서 말했다. 아빠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마음이 불편했다. 수년 전, 야구장에서 아빠와 함께 이름을 외쳤던 선수가 눈물을 보일 때쯤, 어찌할지 모르는 내 모습을 피해 방으로 들어갔다.

 마음 한편에서 죄책감이 몰려왔다. 얼마 못 가 발걸음을 다시 거실로 되돌리게 했다. 다시 나온 거실에는 여전히 격양된 캐스터의 목소리 그리고 함성으로 가득 찬, 야구중계가 거실을 채우고 있다. 커다란 TV 화면에는 나의 야구 영웅이 여전히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지만, 가정의 영웅은 이미 안방으로 모습을 감춘 뒤였다. 빈 맥주잔만이 거실에 놓여 있었다.

 멍하니 둘러봤다. 텅 비어있는 거실, 늘 머무는 공간, 익숙하지만 쉽게 놓치는 물건들의 자리. TV 옆 탁상에는 어린 시절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초록색 티, 검은 바지에 글러브를 낀 모습의. 카메라 너머에는 누가 있었을까? 당신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아채는 순간,


삐그덕


당신과 나 사이, 오랫동안 멈춰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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