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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won Jul 23. 2023

상사에게 정신병원 입원을 알렸다

어쩌다 정신병원 (17)


‘아무튼 출근’이라는 프로그램을 한때 즐겨보았다.



다양한 업계에 종사하는 직장인들을 따라다니면서 일과를 관찰하는 예능 프로그램이었는데 인상 깊게 본 카드회사 대리님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다.


(참고로 지금은 퇴사하고 유튜버를 하신다).


30대 중후반이신데 거의 어깨에 닿을듯한 머리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단발머리 남자는 한국 대기업에서 그리 흔하지 않다고 들었다.


유창한 언변과 업무능력으로 직장에서 인정을 받으시면서 눈치를 안 보시고 육아휴직과 안식년까지 악착같이(?) 챙기시는 모습을 보고 슬기로운 직장생활의 표본 같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것 (회사일)보다 잘됐으면 하는게 제 인생이거든요”라고 하심


그분의 회사 컴퓨터에는 예사롭지 않은 문구가 적혀있다.


“언젠간 짤리고, 회사는 망하고, 우리는 죽는다!”



회사에 대놓고 붙여놓기 어려운 문구라고 생각한다.


취업이 힘든 만큼 많은 사람들이 회사에 최대한 오래 남으려고 노력한다. 한국은 안타깝게도 회사의 이름이 사회 지위를 대변해 주는 계급적 사회기 때문에 더 충성하고 소속감을 드러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 때 나도 ‘좋은’ 회사를 목표로 무턱대고 달렸던 시절이 있었다.


——


비교적 빨리 깨달아서 다행이라고 여기는 개인적인 신념이 있다.


회사를 존중하되 충성까지 할 필요는 없다.


사실 회사는 언제든지 당신을 손절할 수 있다.


사회 초년생 때 겪은 #미투 사건을 통해 첫 회사한테 손절당하고 어렵게 배운, 매우 귀한 레슨이다 (아직까지도 마음 아픈 일이라 글로 풀어내기가 어렵다).


그 후 꽤나 빡센(?) 회사에서 입사와 퇴사를 여러 번 반복한 내게, 회사는 자비 없고 이익만 추구하는 곳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박혀있었다. 그래서 회사에서 최대한 치부를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고 사람들과 나 사이에 보이지 않은 선을 그었다.


나는 자의적이던 타의적이던 항상 회사를 떠날 준비가 되어있다 (물론 있는 동안 업무에 최선을 다한다는 전제하에).


이렇게 회사를 ’비즈니스 관계‘로만 생각하던 내가 회사와의 관계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한 사건이 있었다.


정신병원 입원 때문에 병가를 최대한 끌어 써야 했다.


작년에도 병가 신청 때문에 상사에게 ‘우울증 커밍아웃’을 했지만, 정신병원 입원은 또 다른 레벨이라고 생각돼서 병가 신청 전 주눅이 들었다.


이메일로 간략하게 정신건강이 악화되어 정신병원에 열흘정도 입원한다고 상사에게 보냈다. 불안한 마음에 계속 이메일을 체크하며, 이 정도면 ‘잘릴만하다는’ 자기 합리화를 계속했다. 아픈 매는 미리 맞자는 심경이었다.


거의 바로 답장이 왔다.


영국에 있는 상사는 잘 쉬다 오고 이메일은 아예 보지도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리고 먼저 나서서 내가 cc 된 이메일에 앞으로 모든 이메일은 본인한테 보내라고 답장하셨다.


정신병원 퇴원 후, 일상으로의 복귀는 생각보다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촬영 전 공황이 와서 생전 처음으로 당일 취소했다. 더 이상 위태위태한 상태에서 일을 계속하면 회사와 동료들에게 피해를 주겠다는 생각이 들어 고심 끝에 퇴사를 선언했다.


영국 상사는 진지하게 듣더니, 현재 재정상태와 앞으로 치료 기간 등을 물었다.


그리고 그녀는 퇴사를 반려했다.


“너의 의견은 존중하고, 앞으로도 존중할 거야.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결정은 정신적으로 힘들 때 내리면 안 좋을 것 같아. 혹시 삼 개월 정도 쉬고 와서 다시 생각해 볼래? 그때도 퇴사하고 싶으면 정말 너의 의견을 존중할게. 네가 최선의 선택을 했으면 좋겠어.”


고맙다고 승낙을 한 후 현재 병가를 내고 회복 중이다.


영국 상사의 말을 친구들에게 전했더니 웬만한 한국 회사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부러워했다.




이번 사건으로 회사를 대하는 태도와 생각에 조금 변화가 생겼다.


조직은 개개인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곳이다.


그리고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어떤 사람들이 모이냐에 따라서 그 회사의 문화와 방향이 결정된다.  


영국 상사뿐만 아니라 우리 팀에 있는 아무나 붙들고 내 처지에 대해 같은 말을 했어도 비슷한 반응이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미래에 나의 솔직함이 독이 되어 돌아오는 상황이 있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고 타인에게 진정성 있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내 편이 되어 도와줄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상 모든 관계가 그렇듯, 언젠가 회사와 내가 이별할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만난 인연과 고마웠던 마음은 오랫동안 간직할 것이다.


to be continued


메인 사진 출처는 그림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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