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여행기 - 2
여행의 묘미는 무계획 안에서 생기는 깜짝 생일파티 같은 일들의 연속이라고 생각해 왔다.
INTP에서 P가 82%나 되는 나는 계획에 대한 반감이 있다.
계획을 세우는 순간, 무언가에 타협을 하고 나를 틀에 가두는 느낌이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이지만, 아무튼 그렇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해왔던 수많은 다짐과 세웠던 목표들이 어그러지면서 생긴 피해의식과 회피일 수도 있다.
하지만 평소처럼 계획 없이 갔다가는 헬싱키 중심부에서 커피 멍이나 때리며 이백만 원이 넘는 비행기 티켓을 낭비할 것 같다는 합리적인 자기 의심이 발동되었다.
억지로 노트 앱을 열고 1일 차, 2일 차를 써 내려갔다.
중고등학교 때 푸는 수학 문제는 대부분 풀이 순서가 정해져 있다. 스텝을 건너뛰면 답으로 향하는 길이 어려워지거나 막다른 길로 들어설 수 있다.
여러 곳의 여행 장소를 고르면서, 동시에 가성비와 흥미의 발란스를 조절하며, 사소하지만 중요한 디테일 (현지 교통수단 이용 방법, 로밍 등)까지 신경 쓰는 일은 누군가에게 설레는 여행의 일부분이겠지만 내게는 그저 틀리면 안되는 수학문제 같이 느껴진다.
항상 무엇을 결정할 때 ‘이것이 최선일까’ 하며 나 자신을 100번 의심하는 성격도 계획 세우는 것을 어렵게 한다.
그래서 나보다 훌륭한 지능을 가지고 있는 ChatGPT 챗 지피티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나름대로 촘촘하고 자세한 질문을 물었다.
”나한테 핀란드 일주일 여행 계획을 짜줄 수 있어? 나는 췰 하기 좋아하는 29살 여성이고, 자연, 예쁜 빌딩이랑 산타를 좋아해. 박물관이랑 유물은 그다지 안 좋아해. 8월에 가서 스키는 못 탈 것 같아. “
박물관에 큰 흥미가 없다고 강조했는데, 여행 둘째 날계획부터 냅다 박물관을 넣어버렸다.
인공지능에게 실망한 채 이런저런 블로그를 둘러봤지만 생각보다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오래전에 다녀온 분들의 글을 참고하기에 세상은 너무 빨리 변화하고, 최근에 다녀오신 분들은 대부분 한 곳에 꽂히셔서 장기 투숙을 하셨기 때문이다.
일단 무슨 일이던 내 힘으로 해결하려는 습관을 가지고 있지만, 집단지성의 힘이 필요한 순간이 왔다.
다행히 친구 M이 핀란드 여행 소식을 듣고 먼저 연락을 해왔다.
헬싱키에 있는 public sauna 공용 사우나를 추천해 줬다.
핀란드 사우나가 유명하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어떤 시설이나 분위기일지 감이 안 왔다.
일단 추가.
내가 좋아하는 인디 뮤지션/ 작가에게 연락을 했다. 그녀가 쓴 책에 있는 핀란드 여행기가 문득 생각이 났다.
특히 책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 헬싱키에 위치한 에어비엔비가 궁금해서 링크를 받았다.
안타깝게도 해당 에어비엔비 예약은 꽉 차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호스트한테 연락을 했다.
꼭 그곳에서 머물고 싶은데 혹시 빈 날이 있냐고 여쭤봤더니, 본인 계획까지 살짝 수정하시며 예약을 받아주셨다.
오랜만에 운이 내 편에 선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첫 2-3일 숙소 예약을 하고 일단 계획 세우기를 마무리했다. (사실 이 정도만 계획했는데도 기운이 다 빠져서 나머지는 핀란드 가서 ‘느낌 가는 대로’ 결정하기로 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