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프/ 여행가/ 기자 Anthony Bourdain을 추모하며
일면식도 없는 한 사람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생각할 때가 가끔 있다.
고인이 되신 미국인 셰프/작가/언론인/다큐멘터리 제작가 Anthony Bourdain에 대한 이야기이자 추모다.
삼 년 전, Bourdain에 대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를 봤다 (제목은: "Road Runner: A Film about Anthony Bourdain")
짧게 그에 대해 소개하자면, 뉴욕에서 요리사로 일하다가 밀폐된 주방에서의 거칠고 부당한 환경에 대해 폭로한 "Kitchen Confidential (얼추 번역하자면 '주방을 까발리다')"로 스타덤에 올랐고, 그 후 방송인으로서 소탈한 모습과 직설적인 언행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여행 다큐멘터리 "Parts Unknown"를 찍으면서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했고, 베트남에서는 전 미 대통령 버락 오바마와 함께 쌀국수를 먹으면서 방송인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다.
몇 언론은 그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전 여자친구와의 불화에서 찾았다.
한 개인의 죽음에는 감히 추측할 수 없는 수천만 가지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Bourdain에 대한 다큐멘터리는 자살 전까지 그의 삶을 천천히 흩어 내려간다.
딱히 죽음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하지도 않고, 도출해내지도 않는다. 시청자들이 본 후 각자의 (주관적인) 해석을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공식이다.
다큐멘터리를 본 지 삼 년이 넘었지만, 일면식도 없는 그에 대한 생각이 불쑥불쑥 올라올 때가 있다.
내가 느껴왔던 고충을 그의 삶에서도 얼핏 보았다고 생각해서 같다 (뭐, 투영은 자유다).
Bourdain은 세계 오지를 돌아다니면서 일반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문화와 희로애락을 매일같이 접했다.
다큐를 찍다가 만난 배우와 가족을 꾸렸고 아이까지 생겼지만 그는 항상 항해를 준비했고 집과 여행지 사이를 오가는 왕복선 티켓을 끊고 또 끊었다.
무엇이 그를 계속 세상 모서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도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화면 속에 그는 모든 희로애락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느끼며 사는듯했다.
'희-로-애-락'에서 글자들이 서로 붙어있는 만큼 슬픔도 기쁨과 함께 그를 따라다녔다.
다큐멘터리에서 Bourdain은 차마 위로조차 건넬 수 없는 상황의 사람들을 만난 후 고개를 떨구거나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
이 세상에는 아무리 Bourdain의 영향력과 돈을 사용한다고 해도 해결할 수 없는 고통과 절망의 순간들이 많다.
Bourdain의 여정은 매번 그런 상황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약간의 상상력을 덧붙이자면 Bourdain은 아마 파편처럼 조각나버린 삶들을 계속 조명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유리조각에서 빛의 굴절에 따라 무지개가 보일 때도 있기 때문에.
하지만 지속된 슬픔과 절망은 체화되어 몸과 마음에 흔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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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순간들을 반복적으로 목격하고 경험할 때 찾아오는 답답함이 있다.
Bourdain이 자주 경험했을 법한, 마치 혈관이 막힌 것 같은 순간들.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엄연히 구분되지만 그 경계선을 손쉽게 지워버리는 사람들. 예상치 못한 비극이 갑자기 화살처럼 날아와서 가슴을 턱 하고 뚫는 순간들은 우리 사회와 일상 안에 생각보다 흔하게 존재한다.
시스템과 권력에 의해 짓눌린 몸과 목소리가 있다 (전장연 시위를 보면, literally, 말 그대로 '짓눌린' 몸들이 있다. 중립기어를 미리 박자면, 특정 단체를 지지하거나 옹호하지 않는다. 팩트만 드라이하게 나열하자면, 시위에 참여한 휠체어를 탄 전장연 활동가들을 경찰들이 물리적으로 진압해서 바닥에 '눌려졌다.')
아무리 폐로 깊게 들이마셔도 숨이 '턱' 막히게 하는 구조와 상황. 그 안에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고 그저 옆에 존재만 할 수 있다는 무기력함.
미국이던 한국이던, Bourdain이 다녔던 동남아와 아프리카던, 누구는 차별과 억압을 받고 누구는 옆에서 방관하거나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구른다. 그도 매번 숨이 턱 막혔을까.
- 착취적인 ‘메이드’ 문화를 옹호하는 싱가포르인들과 밥을 먹으며 촌철살인을 한 Bourdain 영상 -
https://youtu.be/ZzKZ_6tV2T8?si=k5Gej-wteCadI2Yv
기자로서 그에게 과하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Bourdain도 저널리스트인 만큼 그와 나의 문제의식과 생각의 결이 아주 조금이라도 겹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끝나지 않는, 끝이 보이지 않는 비극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곧 4월 16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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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생각한다.
Bourdain이 어느 순간 다큐멘터리 여정을 완벽히 정리하고 미국에 돌아와서 부인과 딸과 '반복되는 일상'을 '충실히' 살았다면 아직 그는 이 세상에 남아있을까?
하지만 주방과 삶에서 불을 다루고 쫓던 그에게 아늑한 미국 근교에서 잔디를 깎으며 아이를 등원시키고 매일 같은 시간에 저녁을 먹는 삶은 애초에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Bourdain만큼은 아니지만 평생 이년마다 한 번씩 나라를 바꾸며 이사 다닌 나도 이렇게 '눌러앉아' 사는 삶이 답답하고 불만족스러운데... 세상 모든 자극이란 자극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살던 그에게 카메라 전원이 꺼진 뒤 호텔에서 보내는 밤은 얼마나 적적했을지.
누구나 꿈꿀만한 삶에도 밤의 정적은 공평하게 찾아온다.
그 당연한 사실을 이 다큐멘터리를 본 뒤에야 받아들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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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urdain의 세상 끝을 향한 반복된 여정은 저널리스트로서의 호기심이었을까, 자극을 향한 질주였을까 아니면 체화된 슬픔과 고통에 익숙해진 관성이었을까?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을 향해 계속 헤엄을 쳤던 그를 추모한다.
Rest in pe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