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터미션 Jan 11. 2022

[대화의 기록 2] 두 여자 이야기

<수요일 10시, 아하하하 소희씨> 시작

1. 

아침 8시 출근, 퇴근은 대부분 자정에 가까웠다. 지하철이나 버스에 자리가 나서 엉덩이만 붙였다하면 눈을 감았다. 무거운 두 발을 끌고 집에 들어와서 겨우 세수만 하고 이불 속으로 푹. 그러면 아침이 왔다. 다시 출근했다. 아, 나 참, 힘들게, 열심히 사는구나, 싶다.


1-1.

6시에 일어나 샌드위치를 만들거나, 과일을 깎거나 우유를 데워 놨다. 밥을 먹고가면 좋으련만. 딸내미는 6시 45분에는 나가야하는데 20분까지 (처)잔다. 내 딸이지만, 세수하고 (그 와중에) 머리 감고 옷 입고 차려놓은 아침까지 먹고 가는 게 참 대단타. 어제 입은 옷은 잘도 벗어놨구나. 욕실에는 구렁이 같은 머리카락이 가득하네.


1-1-1. 

천하태평한 아이를 채근해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왔다. 식탁 아래 떨어진 밥풀들과 여기저기 거실에서 한껏 자유분방하게 널부러진 아이의 내복, 수건. 오늘은 볕도 좋으니 마음먹고 일찍 세탁기를 돌려 빨래를 널고, 이불도 욕조에 담가놓아 발로 밟아 빨았다. 청소기로 바닥을 밀고 걸레질도 한다. 툭 튀어나온 내 추리닝 무릎을 보며 엉덩이 한 번 안 붙였구나, 싶어 커피 한 잔 타서 식탁 앞에 앉는다. 분명 하루 나절 종종거리며 일을 했는데, 집안을 쭈욱 돌아보니 어제와 오늘의 모습이 똑같다. 디폴트 값과의 싸움에서 결국 또 졌군. 비포 앤 애프터 사진을 찍어 다른 그림 찾기라도 한다면 사람들이 뭐라도 찾아낼 수 있을까.


2. 

토요일 낮, 엄마가 뭐라도 좋으니 점심은 시켜 먹잖다. 주 5일 바깥 밥을 먹고 다니니 주말 만이라도 집밥을 먹고 싶은데, 그걸 안 해주나. 저녁에 친구 만날 거라 또 바깥 밥 먹어야 하는데 말이지.


2-1. 

사람이 있으나 없으나, 애들이 일찍 오나 늦게 오나 밥은 해 놔야지. 찬이 없을 땐 기가 막히게 알고 일찍들 들어오고, 뭐라도 해 놓으면 연락도 없이 늦는 애들. 돈 벌고 지들도 사느라 참 힘들겠지. 그래도 저렇게 술만 (처)먹고 다니면 어쩌나. 지들이 평생 팔팔할 줄 아나. 또 찬밥이 남았네. 냉장고에 엊그제 한 밥도 그대로인데. 저기다 나물 넣고 비벼서 점심 한술 뜨고 말아야지. 데우고 데운 찌개는 다 쫄아들었네.


2-1-1. 

파스타, 부대찌개, 햄버거, 떡볶이, 순대, 짬뽕, 스테이크, 샐러드. 결혼 전 회사에 다닐 때 참 쉽게도 먹고, 그래서 질려했던 음식들의 이름을, 지금 TV에 나오는 화면을 보며 나즈막히 불러본다. 음식 알러지에 아토피증상이 꾸준한 아이와, 배달음식을 싫어하는 남편과 살다보니, 매일 요리하는 생활 속에 저런 ‘맛있는 외식’은 만나기 힘들다. 주중에는 어쩔 수 없다 해도 토, 일 하루는 좀 가스렌지 앞에 서고 싶지 않다. 뭐라도 사 먹으면 안 될까. 아니면 난 안 먹어도 좋으니 두 남자만 어디 가서 먹고 왔으면. 외식하는 돈이면 이틀 장을 보고도 남지만, 그래도 주말 한 번 쯤만이라도. 


3. 

우리 엄마 목소리는 알아줄 만하다. 어렸을 때 집 밖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다가도 “선아야! 밥 먹어라!” 외치는 엄마 목소리가 동네를 울렸다. 속으로 삭히는 내 목소리가 종종 스스로 답답하기도 해서 엄마의 화통하고 우렁찬 목소리가 부러웠다. 특히 대학교 교양 수업때는 교수님이 출석을 부를 때 두 번 내 이름을 부르는 민망사를 피하고자 심호흡을 크게 해 복부에 힘을 주고 “네!”를 준비했는데 그럴 때 엄마 목소리가 더욱 생각났다. 그런데, 두 시간이나 전화기를 붙잡고 친구와, 아는 아줌마와 통화할 때의 목소리는 왜 내 귀를 사정없이 흔들어대는 걸까? 엄마, 만나서 이야기하시라고요.


3-1. 

동창들이 다 모인다는데, 뭐 그런 댈 나가나. 결혼해서 시집 일, 친정 일 쫓아다니며 애 둘 키우다 보니 모임에 나설 여유가 없었다. 마땅히 입을 옷도 없고, 한 번 입자고 내 옷 사긴 아깝고. 한 번 안 나가니 계속 안 나가지는 모임들. 오랜만에 친구 전화 오면 반갑게 이야기나 하는 거지. 걔는 어떻게 됐니? 아우, 너는 목소리가 그대로다. 남편 이야기, 자식 이야기, 그게 내 이야기지. 시간이 훌쩍. 띵동- 누가 왔네. 얘, 우리 다음에 통화하자, 그래그래 한번 보자. 저기 어디 칼국수 맛있다더라, 점심 때 한번 보자.


3-1-1. 

친구들은 직장에 있고, 서울에 있고, 나는 집에 있고, 타지에 있다. 아이가 어릴 때는 우루루까꿍, 맘마, 까까, 빠빵만 하다가 내 어휘력이 급격히 줄어드는 걸 느꼈는데, 이제 아이가 크니 한낮엔 집 안에 혼자 고요히. 어쩔 땐 입 한 번 뗀 적 없이 해가 지기도 한다. 그러다, 엄마가 전화 했네. 나야 집이지. 엄마도 집이야?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들, 아이가 개구쟁이 짓을 했고, 날씨가 흐렸다가 좋았다가 하고, 먼 사촌이 결혼을 하고 옆집 개가 여전히 짖는다는 이야기를 1시간이 넘게 했다. 그래도 할 이야기가 남은 것 같은데. 오늘은 이렇게 성인과 대화라는 걸 했네. 기분이 좋다.




나는 엄마처럼 산다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설거지를 하면서 가곡을 흥얼대고, 화통하게 웃어재끼고, 종종 책을 읽었다. 그 많은 다채로운 일들을 해치우면서도 고민은 뒤로, 실행은 앞으로 하는 모습의 엄마를 존경했다. 


하지만 엄마는 자신처럼 살지 말라고 했다. 결혼은 안 해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딸이 소개팅에 나갈 때마다 옷도, 신발도 사주셨다.) 그런데 나는 아이로 태어나 여자로 자라서 여성이 되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후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서 엄마를 보았고, 내 삶 속 엄마를 통해 과거 나의 모습이 보였다. 지나온 삶과 지금의 삶, 내 두 발 앞에 새로 나고 있는 길이 ‘엄마’라는 문을 통해 비춰졌다. 


그것이 나에겐 왜인지 참 위로가 되었는데, 혹시 이런 나의 느낌들이 엄마에게도 어떤 ‘의미’가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엄마, 우리 그럼, 엄마 이야기를 제대로 해 보는 거 어때?” 엄마의 이야기가 궁금한 만큼 그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나의 이야기도 궁금했다. 엄마는 평소처럼 화통하게 “아하하하, 너무 좋지!”


엄마가 된 두 여자는 그렇게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 어떤 식구들의 간섭도 없을 시간에, 비로소 한 숨을 돌리고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볕 좋은 시간에 전화통을 붙잡았다. 고참 엄마의 과거와 신참 엄마의 지금이 오고가는, 두 여자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대화의 기록] 두 번째 프로젝트,

고참 엄마와 신참 엄마, 두 여자의 이야기 <수요일 10시, 아하하하 소희씨> 기대해 주세요. ^^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