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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미션 Jan 19. 2022

3. 싸울 땐 일본어로

[수요일 10시, 아하하하 소희 씨]


그땐 중학교 과정이 6년이었나? 아버지가 거기 나오시고 양성소도 나오셨지. 원래 육사에 가고 싶으셨데. 그런데 할아버지가 죽을까 봐 못 가게 하셨다지. 그러니까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이, 내가 죽지 않았으면 지금 장군이 됐을거다, 이거야. 아들이 다섯이나 되는데 하나 죽으면 어떠냐, 이거지 아버지는. 여튼 할아버지가 누구하고 사바사바해서 아버지를 선생 만들었다데. 그런데 아버지가 실력이 좋아서 교대 나온 사람들보다도 일찍 교감, 교장도 되셨지. 


아버지 정년 퇴임을 홍성초등학교, 나 졸업한 학교에서 하셨잖아. 그때 너도 갔었지. 그때 네가 청바지에 하얀 나시 티 입고, 청으로 된 빵떡 같은 모자 쓰고 갔었어. 내 친구 중에 선생 하는 애가 있는데 아버지 정년 퇴임식에 내 친구이기도 하니까 왔더라고. 와서는 “니 딸 서울 애라 다르다, 이쁘다” 그런 이야기를 했어. 난 너희들 어렸을 때 절대 촌티 나게 안 입혔어, 난 몸빼만 입었어도. 옥수동 살 때 옷 팔던 여자가 다른 집 엄마들한테, 저 아줌마는 아들이랑 딸은 저렇게 이쁘게 입히면서 자기는 왜 저러고 다니냐고 하더래. 내가 꼭 터미널(고속터미널 지하상가) 가서 옷 사서 위아래 맞혀 입히고 그랬어. 진짜 돈 아끼느라 동대문 난전에서 애들 옷을 사 입혔는데, 그때 영순이(엄마 막내 동생)가, 아이구, 서울 애들은 옷 세련되게 입네, 그러더라고. 그 옷 싸게 사려고 얼마나 난전을 뒤졌는데. 아하하하하. 그때가 돈은 없어도 좋았지. 그렇게 저렇게 입히면 애들이 어찌 그리 이쁜지. 지금은 아들네 가면 아들은 흰머리가 수북하지, 딸은 시집가서 저렇게 멀리 있지. 



대화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그날의 주제를 마음 속으로 정해두었지만, 물고를 튼 이야기와 뻗어나가는 이야기는 거의 대부분 달랐다.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고, 그 이야기가 예상하지 못했던 다른 이야기의 문을 열어 놓았다. 엄마와의 이야기가 ‘인터뷰’가 아님을 나는 항상 생각했다. 우리는, 엄마가 된 두 여자가, 평일 한 낮에 화장실도 가고, 택배도 받고, 광고 전화에 한 번씩 맥이 끊기면서도 전화통을 붙잡고 말하고 들으며 일상을 나누는 것이었다. 그게 뭐라고, 개운하고 재미졌으며 종종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갔음에 놀랐다. 



옛날에는 다들 돈이 없긴 했지. 그래도 남들만큼 걱정하진 않았어. 그래도 내가 월사금 제일 꼴찌로 냈어. 봉희가 항상 일등, 성질이 지랄맞아서. 아하하하. 영순이 이모는 별 소리 안하는데 막내니까 먼저 주라고 하고. 연옥이는 마음이 고왔어. 내가 연옥이 먼저 주라고 하지. 여하튼 내가 꼴찌로 많이 냈던 것 같아.


그런데 우리 엄마, 아버지는 아들이라 더 해주고 딸이라서 덜 해주고, 그런 게 하나도 없었어. 우리 아버지가 딸들한테 ‘지지배’ 그런 이야기 한 번도 안 했어. 딸이라 안 된다, 아들이라 된다, 그런 걸 자라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어. 그러니까 증조할머니가 “쟤는 딸 낳았는데 뭐가 이쁘다고 저렇게 쪽쪽 빠냐”고 아버지한테 그러셨지. 아버지가 네 번째 딸을 낳았을 때 학교에서 한턱내라고 안 하더래. 다른 사람들이 생각해도 딸을 내리 넷 낳았으니 걱정이었나 봐. 그래서 아버지가 나서서 한 턱 내셨다고 그러더라고. 내가 중학교 들어갈 때까지 아빠, 아빠, 하면서 컸는데 중학교 들어가면서 존댓말 했지. 그러니까 너네 아빠가 아버님이 너무 자유롭게 자식들을 키웠다, 어쨌다, 그럴 때 내가 똑똑하게 크진 못했을지라도 인성은 좋게 컸다고 그러지. 그건 다 엄마, 아버지의 영향이야. 



‘딸은 어때야 한다’는 말은 1981년 생인 내가 들어온 말이다. 엄마가 맏며느리 타이틀에 몸 바쳤던 이 시대 마지막 엄마가 될 것 같다면, 나는 맏손녀라는 타이틀에 적어도 몸의 절반을 담궈야 했던 이 시대 마지막 딸이 될 것 같기도 하다.


8남매 중 장남을 아버지로 둔 딸인 나는, 매달 있는 제사와 계절별 찾아오는 명절에 어김없이 맏며느리와 산다는 이유로 현장에 가장 먼저 동원되곤 했는데, 미취학 아동 시절부터 여기에 고춧가루를 붓고, 저기에 넣을 마늘을 빻고, 시금치를 다듬는 등의 소소한 일부터 전부치기, 상 차리고 치우기, 집안 대청소 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손이 야무지다는 칭찬이 어린 고사리 손과 마음을 앗아갔는데 그것이 결국 높은 기대치와 할당량을 정하는 족쇄였음을 그땐 몰랐지. 아빠는 “집안 일 잘하는 사람이 공부도 잘 한다.”고 고3 때 제사를 맞아 시험을 앞두고도 야자를 빠지고 집에 와 걸레질을 하는 내게 말씀하셨고, “맏손녀는 다 그렇다”는 할머니와 삼촌들의 말이 등 뒤에 심심찮게 꽂혀 왔다. 엄마는 때때로 이런 상황에 화가 난 듯했지만, 절대적으로 손이 부족한 때에 나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스스로를 어쩌지 못할 때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든 것은 결혼하고 나서였다.



그래도 아버지가 막 놓아서 우릴 키웠냐, 그건 아니야. 내가 친구들끼리 수덕사 놀러간다고 하고 가니까 아버지가 나 찾으러 오셨다니까. 난 나 못 놀게 찾으러 오신 줄 알고 보고도 모른 척 하고 왔거든. 그런데 나중에 들어보니 우리들 점심이나 사 주시려고 가셨다더라고. 그래도 어디가든 당당하게, 모나게 키우지 않으셨지. 모든 걸 이해하셨어. 자식이 여섯인데 한 번도 험한 말 하신 걸 못 들었거든. 두 분이 싸울 때는 저쪽 방으로 가서 일본 말로 싸우고. 그런데 우리들 다 크고 나서는 대놓고 막 싸우더라. 아하하하하.



* 중학교 6년제 : 해방 이후~1951년까지 일제의 영향을 받아 중학교는 중고등학교 과정을 합친 6년제였다. 중학교를 마치면 대학에 가는 제도. 


* 양성소 : 짧은 기간 내에 전문 지식을 가르치는 곳. 광복 이후 과도기에 사범학교의 졸업생만으로는 갑자기 증가된 교원의 수요를 충당할 수 없어 다양한 비정규교원양성과정이 개설되었다고 한다. 전국 각 도에 설치된 양성소 외에 중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한 단기 과정도 있었는데, 이 과정 이수자에게는 초등학교 준교사 자격이 부여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 월사금 : 다달이 내는 수업료.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의무교육으로 지정된 중학교 때까지는 별도 수업료 없이 운영지원비(전 육성회비)만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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