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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미션 Jan 21. 2022

4. 홍성역 그 할머니는 어디로 가셨을까

[수요일 10시, 아하하하 소희 씨]

무궁화호를 타고 두어 시간, 외갓집에 갈 때면 기차를 탔다. 속이 울렁거려 와악 하고 토를 한 적도 있었고, 속이 울렁거린다는 나를 챙기다 엄마가 먼저 와악 쏟아낸 적도 있었다. 미리 붙인 키미테는 별 소용이 없는 듯 했다. 그렇게 홍성역에 도착하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앉은뱅이 걸음으로 역사 안을 다니며 동전을 구걸하던 한 할머니가 계셨다. 성인이 되고 외가에 매년 가지 않게 된 이후 어느 날, 그 앉은뱅이 할머니가 안 보인다고 엄마가 전했다. 엄마도 들은 말이라 하고 해 준 이야기 중에, 누군가는 그 분이 집에 갈 땐 벌떡 일어나 걸어 나간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시내에 건물이 몇 채 있다고도 했단다. 하지만 수년간 앉은뱅이 할머니를 내친 사람은 역 안에서 본 적이 없었고, 나 역시 동전 몇 개를 주름진 손바닥 위에 놓아드린 일이 있다.


홍성역을 나서 잠깐 차를 타면 외갓집에 도착했던 것 같은데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다. 가는 길에 있던 조양문이 역사 유적이라 하여 방학숙제를 위해 사진을 찍어 내기도 했다. 한때는 친가인 당진보다 도시 냄새가 났지만, 지금은 천지개벽한 당진에 비해 홍성은 도시화의 영향이 조금 덜 미친 듯하다. 나의 고향이 아니라 그런가, 외조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지금 외가에 갈 일이 없어져서 그런가, 홍성이, 외가가 있던 그 자리가 변함없다는 것이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외가에 들어서면 마당 가운데 제법 큰 화단이 있었다. 화단 가운데엔 커다란 모과나무를 비롯해 몇몇 꽃피는 나무가 있고, 잔잔한 채소와 꽃들이 주변에 자리했다. 눈이 오던 겨울 화단 위를 비집고 다니던 기억이 나고, 어렸을 때 외가에서 키우던 커다란 개가 돌진하자 기겁하며 화단을 지나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던 오빠의 모습도 생생하다. 그곳, 홍성에서 엄마 소희 씨는 열 살 무렵부터 결혼 전까지 푸르른 시간을 함께 했다.



어렸을 때부터 키가 컸지. 고등학교 2학년까지 맨 뒤에 앉았고,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뒤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았어. 내가 덩치도 크고 키도 크니까. 또 학교 다니는 오빠보다 내가 글씨를 더 잘 읽더래. 엄마가 나 학교 보내면 엄청 공부를 잘 할 것 같았다고, 아하하하. 그런데 학교 들어가서 얼마 지나니까 학교 다니기 싫다고 그랬다데. 아하하하.


일곱 살에 학교에 갔는데, 뭐 그땐 놀기 바빴지. 1등은 못해도 상위권이긴 했는데, 그때 학원 같은 게 있길 하니, 학교 갔다 오면 그냥 애들끼리 놀아. 제일 잘 했던 게 5학년 때인가? 한 반에 60명 씩 있었는데 그렇게 놀고도 3등인가 했더라고. 6학년 때는 중학교 가려고 좀 열심히 했지. 그땐 시험 봐서 중학교 갔으니까. 홍성군에서 홍성여중 딱 하나 있었는데 내가 27등인가, 37등으로 들어갔다고 작은 아버지가 그러시더라. 내가 날 보면, 막 외워서 시험 보는 것 보다는 모의고사 식으로, 생각을 좀 해서 보는 시험에 강하더라고. 선민(소희 씨 아들)이 같은 타입이지. 한마디로 정리 되잖냐. 아하하하하.



어제 주말의 명화를 보고 자버렸다는데 1등을 한 친구만큼, 나이트클럽에서 밤새 춤추고도 의과 수석을 도맡은 슬기로운 의사 익준이만큼, 얄밉지만 어찌할 수 없는 캐릭터 아닌가. 언제나 엉덩이 싸움으로 승부를 보려 했건만 그 승부 끝에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표를 받았던 나로서는, 왜 그런 유전자를 오빠에게만 주었는가, 통탄을 금할 길이 없다. 뭐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긴 하지만.



특별히 잘 하는 건 없었어. 그래도 음악을 좋아했지. 노래도 반에서 우월하게 잘하진 않았지만, 지금도 노래 좋아하잖아. 가곡 같은 걸 아주 좋아했어. 지금도 유행가는 별로 안 좋아해.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 어렸을 때 그 생각이 들더라고. 근데 엄마가 안 가르쳐 줬어. 그땐 피아노 배우는 사람이 거의 없기도 했고. 근데 내가 엄마한테 “나 피아노 배우고 싶어” 이렇게 조르거나 그러지 않았지. 내가 등록금도 제일 꼴찌로 냈는데 뭐. 그리고 피아노 선생이 개인지도 다니는 건 봤지만 피아노 학원 같은 것도 없었고.


우리 아버지가 음악적인 재질이 있으셨어. 초등학교 선생님이셨잖아? 근데 어느 때 대전에 있는 중학교에서 음악 선생으로 오라고 했다는 거야. 그런데 울 엄마 말이, 너희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홍성 떠나면 죽는 줄 알고 안 가셨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엄마한테 “엄마는 가고 싶었어?" 물으니까 가고 싶었대. 그러면 애들도 더 잘 가르쳤을 것 같고, 사는 건 여기나 거기나 똑같았을 것 같고.


여튼 아버지가 술 드시고 오신 날에는 자고 있는 우리들을 다 깨워. 깨워서 노래를 부르라고 해. 그러면 아버지가 아코디언을 치셨지. 아버지가 아코디언을 얼마나 잘 치셨다고. 아버지는 당시 부잣집 아들이었으니까 월급 생각 안 하고 그런 거 퍽퍽 사고 그랬어. 나 어렸을 때 우리집에 유일하게 전축이 있었고. 전축 나오자마자 아버지가 최고 먼저 사셨던 것 같아. 옛날 전축이니까 케이스에 넣어서 크기가 엄청 커. 그래서 보기가 참 좋았어. 지금 생각해도 고급스러워. 그거 사니까 동네 사람들이 다 구경 왔지. 텔레비전도 나오니까 제까닥 샀고. 아버지가 정서적인 면, 그런 걸 좀 많이 생각하셨어.



아마도 시작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였을까? 중학교 2학년 초까지 피아노 학원에 다녔는데 학원을 그만두며 ‘7년간 배웠네’ 했던 것이 기억난다. 나보다 일찍 피아노를 배웠던 오빠는 이미 지루하다며 나가 떨어졌고, 역시 엉덩이 싸움의 강자인 나는 꾸준히, 잘한다는 칭찬에 제법 빨리 진도가 나갔던 것 같다. 학교 대표로 합창대회 반주도 하고 성당에선 미사 반주자로 오르간도 연주했다. 남자아이들 대부분이 태권도 학원에 다녔던 것처럼, 당시 여자아이들 대부분은 피아노 학원에 다녔는데, “친구 누구도 피아노를 샀다”는 나의 성화에 못 이겨 어느 날 집안으로 원목으로 된 영롱한 영창피아노가 들어오는 감격적인 날도 맞이했었다. 이후 엄마는 성가를 부를 때마다, 가곡을 부를 때마다, 혹은 어떤 마음이 솟아오를  때마다 내게 반주를 해 달라, 노래를 쳐 봐라 했고, 아빠는 손님이 오시는 특별한 날엔 식사 중 내게 연주곡을 치라 해서, 막내 외삼촌이 꼭 경양식 집에 온 것 같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이후 ‘세계적으로 이름을 드높일 천재적인 실력은 아니다’라는 나와 무리의 판단 아래 피아노 배우길 그만 두었는데, 이후부터 엄마는 조금씩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두 자식들이 밥벌이 하러 나가고, 오래 모신 시어머니가 세상을 등지자 엄마는 동네 피아노 학원의 문을 열고 들어가 초등학생들과 함께 뚱땅거렸다. 그 학원이 문을 닫자 새로운 학원을 찾아 배우기를 이어갔는데, 마침 나이 대가 맞는 원장님과 친구가 되어 배우고 이야기하고 살아가길 10년, 배움의 시간으론 나보다 앞선 셈이다. 그러고 보니 엄마는, 엉덩이 싸움도 잘 하는 것이었다.


조양문 : 충남 홍성군 홍성읍에 위치. 홍주성의 동문. 1906년 을사조약에 반대한 홍주의병과 일본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역사의 현장이라고 한다.(글/사진 출처_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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