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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미션 Apr 03. 2022

8. 장은 단추에 지져야 할...까요?

[수요일 10시, 아하하하 소희 씨]

경찰서 앞에 내 친구가 살고 있어서 퇴근하다 들러서 얘기도 하고 놀다 가고 그랬거든. 그런데 어느 날 그 집 앞에 서서 친구랑 한참 이야기하는데 황순경이 지나가. 나한테 와서 내일 자기한테 전화 좀 해 달래. "왜요?" 그랬더니 하여튼 전화 좀 해달래. 그래서 알았다고 하고 다시 친구랑 얘기했지.


친구가 무슨 일이냐고 묻길래 "나한테 전화해달라고 하는거 보니 뭔 일이 있나봐." 했지. 난 워낙 다른 경찰들하고 전화를 많이 하니까. 그러니까 그 친구가 딱 그래. "얘, 저 사람이 너 좋아하나보다." 하고.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었지. 그리고 난 저 사람 안 좋다고, 내가 저 사람 만나면 손에 장을 지진다고. 나중에 그 친구가 그러더라. "야, 너 손에 장 지졌니?" 아하하하하하.


그 다음날 한참 일하다 점심시간이 됐는데, 아! 황순경이 전화하라고 했지, 싶어서 경비전화로 했다. 그런데 왜 경비전화로 전화하냐고 막 뭐라고 하는거야. 그러면서 어디서 만나자고 했던 것 같아. 그때부터 이상하다, 그랬지. 그러고 얼마 있다가 아빠가 수사과 서무과로 발령 받아 왔어. 내 맞은편에 앉았지. 그 전까지 둘이 데이트를 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오며 가며 아빠가 나한테 대하는게 좀 달랐지.


그때 수사과 직원들이 사복을 입었거든. 근데 아빠는 사복이 없어서 전투복이라고, 작업복같은 걸 입고 다녔지. 점퍼에다 그 전투복 바지를 맨날 입는 거야. 어휴, 저렇게 가난한가, 싶어서 내가 아빠를 처음엔 좀 불쌍하게 봤어. 모든 게 측은해 보였달까.


그러더니 한 번은 전투복 단추가 떨어졌다고 나보고 꿰매달라고 해서 내가 그 단추를 달아줬어. 자기는 옷을 입고 있고 난 그 사람 코 앞에 서서 단추를 달아줬지. 좀 연속극 같지? 하하하하. 남자 가슴팍에다 단추를 달아줬더니 거기 있던 다른 사람이 "처녀 총각 둘이 사귀어, 어허허허." 그러더라고. 거긴 원래 남자들이 바글바글하니까 난 아무렇지도 않았어.


그 시절에 아빠가 다른 사람 둘이랑 남자 셋이 하숙을 했는데, 총각 셋이 모이니 여자 얘기를 얼마나 하겠어. 그런데 거기 같이 살던 한 사람도 경찰인데, 나한테 그러는거야. 규복이가 박양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다고. 그 소리를 하는데 내가 덜컥 겁이 나더라. 소문이라는 게 금방 다 나잖니. 아이고,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혹시 아버지가 아시면 어쩌나.


이것은 내게 배신이었다. 나의 아빠와 엄마가, 연애결혼을, 그것도 사내 연애를 했다는 사실을 안 최초의 순간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자만추'는 내 길이 아니라 여겼던 나의 지난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나를 거쳤던 이성들은 모두 소개팅이라는 인위적인 과정을 통해서였다. 나는 일로 만난 사이에서는 일만 해야했고, 길거리는 그저 목적지를 향해 지나가는 곳이었다. 선배는 선배고 후배는 후배이며 동기는 동기였다. 누군가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를 적어 내 책 위에 얹어놓거나(나 몇십 년대생?), 별 일 아닌 것으로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내도, '저 사람이 왜 저러나' 하고 무심히 넘겼다. 둔한 감각도 문제였지만 아는 사이에서 묘한 사이로의 발전이 생각만으로도 내겐 여간 낯설고 쑥스럽고 어찌할 바 모르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 참으로 깝깝하고 깝깝했던 나란 사람의 캐릭터가 분명 부모님의 DNA에서 발현되었을 것이라 믿었는데, 타고나길 이러하니 어찌하겠나 마음만은 편했는데, 엄마와 아빠는 '자만추'의 산증인 아닌가. 내가 돌연변이였다니! 여자친구가 부재중일 때가 없었던 오빠가 엄마와 아빠의 유전자를 정통으로 계승한 자였다니. 그리하여 방법도 충실하게 따라 2대째 사내 연애로 결혼의 문을 열었던 것이었다니!


한 3년하고 몇 개월 사귀었나? 연애라고 뭐 그때 할 게 있었나. 우리가 어디 놀러다니고 그럴 성질도 아니고. 우리 연애한 3년이 남들 몇 달 연애한 거랑 똑같을 걸? 되는대로 만났지. 시골은 갈 데가 없으니까 저 뒤 냇둑이나 집 뒷길 다니면서 얘기하고 슬슬 월산 갔다 오고. 봄이면 딸기밭 가고 여름이면 복숭아밭 가서 뭐 사먹고 오고 그랬지. 과수원들이 거기 다 있으니까. 그리고 각자 여자친구, 남자친구 데려와서 다니고. 커플끼리 아니더라도 뭉쳐서도 많이 다녔지. 남들 있으면 저만치 떨어져서 가고 뒷길로 가면 손 붙잡고 가고 그랬지 뭐.


한번은 예산 어딘가 가자고 해서 내 친구를 데리고 갔어. 그런데 아빠는 혼자 나왔어. 나보고 왜 혼자 오지 친구랑 같이 나왔냐고 뭐라고 하더라니까. 하하하하. 아니, 거길 어떻게 단 둘이 가냐, 난 또 그랬다. 아하하하하하하하, 아이고 참말로, 하하하하하하하하.


깨가 쏟아졌냐고? 무슨! 만날 때마다 싸웠거든. 하하하하하.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결혼했나 몰라. 아빠의 그 승질('성질'이 아니다)이 그때도 있었어. 지금도 생각하면 딱히 단점을 뭐라 얘기할 수가 없는데, 모든 걸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했달까? 선민(소희 씨 아들)이가 뭐라고 했는 줄 아냐? 엄마가 아빠를 이긴 걸 본 적이 없데. 아빠가 지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다 하고 싶은대로 하셨다 이거야. 나는 딱딱거려도 아빠가 뭐 하자고 하면 그걸 다 해줬고. 그때도 늬 아빠는 역시 그랬어. 그러니까 짜증이 났지. 그런데 딱히 헤어질 만한 명분이 없었어. 하하하하하.


무슨 일 때문에 싸워, 그럼 난 기분이 나빠. 저런 사람 이제 절대 안 만난다, 그러다가도, 아빠가 또 요상하게 자상하게 하는 게 있잖아. 이를테면, 경찰서니까 사무실에서도 거친 말들이 오가고 그러는데 그런 말을 내가 들을까봐 걱정하고, 내가 조금 늦게 일이 끝나면 나 배고플까봐 걱정하고, 그런 게 있었어. 또 그때 경찰이 엄청 바빴어. 저녁에는 야간 근무하고, 그리고 아빠가 초차였으니 얼마나 더 바쁘겠니. 그런데도 나 만난다고 하면 저녁도 못 먹고 빵쪼가리 들고 나와. 그렇게 나와서 만나고 가고. 바빠서 연애 못한다는 건 정말 거짓말이야. 아빠도 정말 시간이 없을 땐 나보고 자기 마음대로 어디로 나오라고 그러지. 난 짜증도 났는데 그래도 나갔지. 가 보면 자기는 밥도 못 먹고 작업복에 군화 신고 나와 있어.


아빠 친구들이나 내 친구들은 우리가 사귀는 거 다 알았지. 그런데 우리집은, 한 1년 넘게는 몰랐을거야. 절대 얘기 안했지. 그때는 남자의 '남'자만 꺼내도 깜짝 놀랄 때니까. 더군다나 경찰하고? 우리 아버지가 경찰하고 세무사하고 기자가 제일 싫다고 그러셨는데? 그런데 딸이 경찰하고 사귄다니 아시고 어떠셨겠어. 엄청 반대했지. 헤어지라고.


*월산 : 충남 홍성군 홍성읍 원산리 위치. 홍성의 서쪽에 위치한 해발 394m의 소박하고 아담한 산. 정상에 서면 서쪽으로 서해 천수만이, 동쪽으로는 홍성 시가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고 한다. 현재까지 홍성군민 체육대회 성화 점화지이자 새해 첫날 소원을 빌며 해맞이를 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홍성군 문화관광 홈페이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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