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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미션 Feb 19. 2024

괜찮다, 뭐가 되지 않아도

"근데! 거 뭐 될 필요는 없다!"


한동안 멍했다.

결혼 후 아이를 낳고 뒤늦게 상담대학원에 합격했다는 딸에게 "등록금은 아빠가 해주가서!"하고, 침을 퉤퉤 묻혀가면서 지폐를 한 장 한 장 세서 내밀면서 큰소리로 아빠가 했다는 말이다. 상담대학원에 갔어도 꼭 상담사라는 직업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말. 심윤경 에세이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에 실린, 작가의 친구 이야기다.


이 에피소드가 실린 16장 '기대와 격려의 두 얼굴' 부분에 오랫동안 마음이 사로잡혀 있다.


저자는 스스로 고백했듯 엄마의 기대에 부응해 공부를 잘했고 좋은 대학에 입학하고 좋은 직장에도 몸담았다. 소설가로서도 여러 문학상을 수상했는데 그의 인생 내내 무탈히 주변 기대에 성과로서 부응해 온 셈이다. 그런데 자신이 받아온 기대와 격려에 어떤 폭력성이나 무신경함이 숨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너는 잘 할 수 있다'는 주변의 응원에 의구심을, 소설을 쓰지 못하는 막다른 골목에 부딪혔을 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해도 나는 여전히 나일까? 주변 사람들은 내가 더 이상 소설가가 아니라도 나를 사랑하고 환영할까? 언제나 성취해왔기 때문에 나는 이런 질문에 익숙지 않았다. 무언가를 잘해낼 능력과 자신감이 없는 상태에서 '잘할 것이라고 믿는다'는 말은 '잘하지 못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으스스한 협박처럼 들렸다.  - p.197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중


과거 퇴사를 염두에 두고 이후 나의 미래를 여러가지로 그려봤을 때, 그 중 한 가지 선택지는 박사 과정이었다. 직장은 그만두어도 커리어는 이어가고 싶었는데 전공을 계속 파는 것이 가장 수월한 방법일 것 같았다. 학생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신분이라는 것을 진즉에 깨달은 어른이자, 오로지 혼자 무엇에 몰두하여 정진하는 것을 더욱 갈망하던 시기였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갓난쟁이 아이(이 말은 앞으로 키울 날이 하염없이 펼쳐져있는)를 둔 전세살이 외벌이 가정의 고정수익 없는 주부. 만약 박사가 되겠다 하면, 학위를 향해 가는 도중에 들어간 등록금이라는 투자금이 학위로서 회수가 되어야 했고 더하여 꾸준히 이윤을 창출할 수 있어야 했다. 뭐가 되어도 대단한 무엇이 된다는 증명된 결과값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선택. 하지만 학위는 자격증이 아니라 자아실현의 결과 아니더냐. 온갖 고난과 역경을 헤쳐가며 긍정과 불굴의 투지로 결국 무언가룰 '이뤄낼' 자신도 없었다. 박사 공부는 내 안에서 조용히 접었다. 나는 무엇이 되어야만 나를 인정할 수 있었다. 투지가 부족하다는 자괴감도 더해졌다. 그 틀에서 오랜시간 방황했다. 그 무엇도 되지 못한 채.




지난해 책이 나오고 고맙게도 많은 지인들이 책을 구매해주었다. 세상에 책을 내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며 작가님 칭호를 거하게 붙여 몸둘바를 모르게 만드는 분들도 계셨고, 책의 내용과 소재에 깊이 공감해 단숨에 끝까지 읽었다는 이들도 많았다. 모두가 참으로 감사하다. 타인을 넓게 품지 못하고 산 것 같은데, 그에 비하면 너무나 따뜻한 관심들이다. 하지만 의심할 수 없는 응원, 격려, 축하 속에서 못내 마음에 걸리는 메시지도 있었다. '참 아깝다'는 말.


직업인으로서, 한 분야 종사자로서 써왔던 나의 글을 오랜 시간 지켜본 이들이 책을 읽곤 "이렇게 글을 잘 쓰는 사람인데, 참 아깝다"며 나의 등을, 어깨를 토닥였다. 앞으로의 왕성한 활동을 독려하는 진심어린 격려가 분명할진데, 그래서 '아직 나 죽지 않았으' 하며 속으로 으쓱한 마음이 들다가도 곧 재주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그저 좁은 방에 앉아 무력한 숨만 내쉬는 내 모습을 그리게 되었다. 여전히 무엇이 되지 못한 아득한 내 신세, 그래서 아까운 사람, 나.


나를 나로서 사랑한다는 건 참 힘든 일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그래야 한다고, 그러자고 말하는데 그건 어떻게 하는 것일까.


심윤경 작가는 친구와 함께 친구가 아빠에게 받았던, 스스로의 두려움을 이기게 해준 무언가에 대해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눈 후 그것을 '편안함'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뭘 잘 해내지 못하더라도, 어떤 조건 없이 그저 편안하게 나를 봐 주는 것. 그 편안함 속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나아갈 용기가 저절로 솟아났다는 것이다.


아, 그거였다. 편안함.

안달복달하지 말고, 무엇이 안 되어도, 무엇이 되었다 생각이 되어도,

그 상태의 모습을 그저 편안히 바라봐주는 것.

외면, 포기, 무관심이라 스스로 자책하지 말고

따뜻하고 넉넉한 시선으로 나를 잠시 두는 것, 그래도 충분히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한 인간으로서 온전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편안함'이라는 단어를 통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일지 조금은 알게 되는 느낌이다.


분주하거나 아득한 일상 속에서 정신이 차려질 때라도

그저 내버려둬보자.

편안하게 나를 보고 타인을 보아보자. 그래도 된다.

마음을 편안히 두어보자.

그래도 충분히 괜찮다.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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