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 보통사람에 비하여 극히 뛰어난 정신능력을 선천적으로 가진 사람
범재 : 평범한 재주를 지닌 사람
수재 : 보통사람보다 뛰어난 재능, 또는 그러한 재능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말
- 네이버 지식백과 -
박 : 박식하기 그지없고
명 : 명석한 두뇌를 가진
수 : 수재요!
- 무한도전 中 박명수의 삼행시 -
고등학교 교실 안, 혈기와 압박이 팽창하여 본인 외 어떠한 사람들에게도 깊은 관심을 가지기 힘든 시기에, 아주 조금만 그 안에서 벗어나 살펴보면 사회에서는 찾기 힘든 다양한 모습의 학생들이 있다.
가장 첫 번째로 문을 열고 교실에 들어오는 부지런한 학생, 지각임에도 매우 당당하게 사과하며 앞문으로 들어오는 학생, 수업이 시작하자마자 고개를 숙이고 잠에 빠져드는 학생, 선생님이 하는 말을 모두 빼놓지 않고 적으려는 학생,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그렇다고 안 하지도 않은 그 절묘함 사이에 눈에 띄지 않은 '평범한 수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는 아주 조금 남들보다 이해력이 빠르고, 집중력이 있으며, 남들과 비교하여 아주 근소한 차이로 사건과 인간관계에 대한 시스템적 사고를, 인과관계를 파악하여 무엇이 근본적으로 취해야 할 행동인지에 대한 자각을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가 남들보다 떨어지는 능력도 당연히 많았다.
우선, 그는 운동신경이 남들과 비교하여 조금 떨어지는 수준이었으며 외모도 이성이 판단하기에 편차는 조금 있겠지만 평범 혹은 그 이하로 평가받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 외에도 매사에 열정이 부족하여 무언가에 흥미를 느끼면 일정 수준에 도달하는 것은 빠르지만 그만큼이나 빠르게 흥미가 식어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목표에 있어서, 그것이 만약 그가 판단하기에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게으름을 무릅쓰고 일정한 루틴으로 차근차근 나아갔다. 그렇게 그는 남들보다 조금 더 좋은 대학교에 입학하여 그저 그런 학점을 받고 규모가 있는 중견기업에 취업했다. 그리고 그는 지금 할 일이 없다.
입사한 뒤 약 2주간의 짧은 OJT를 마무리하고 회사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서류를 처리하는 경영지원팀에 배정되었다. 동기는 총 5명으로 누가 봐도 파이팅이 넘치는 사원 3은 영업팀에, 붙임성이 좋지만 평소에는 말이 별로 없는 사원 4는 인사팀에, 무테안경에 넓은 어깨, 맞춘 것 같은 정장을 항상 넥타이까지 차고 다니는 깔끔한 사원 5는 마케팅 팀에 배치되었다. 사원이 들어와서 쉽게 일을 배울 수 있는 경영지원팀은 나와 사원 2가 함께 배치되었다.
중견기업인 만큼 대기업보다는 아니지만 1차 서류와 2차 면접, 마지막 임원 면접까지 통과한 신입들이니 적어도 새로운 일을 배움에 있어 어려움은 전혀 없는 사람들로 뽑았을 거라는 기대는 내 옆 동기를 보며 산산이 무너졌다. 그녀가 가장 잘하는 일은 신입사원의 패기가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사수가 부르면 항상 큰 목소리로 대답하며 몸을 돌렸고, 업무를 지시함에 있어 중간중간 이해를 돕기 위해 질문하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자리에 돌아가기 전 사수가 이해했냐는 물음에는 항상 ‘네!’라는 대답과 함께 컴퓨터 앞에 앉았다.
사수는 기한 없는 기다림과 내적 수행을 통해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업무의 진척도를 물어봤지만 항상 그녀는 곧 마무리할 것이라는 긍정정인 대답과 함께 본인에 업무에 집중했다. 결과는 당연히 지시내용과 전혀 다른, 그리고 낮은 퀄리티의 보고서가 올라왔으며 그의 상사는 한숨을 쉬며 다시 한번 마음에 ‘그래도 아직 사회초년생이고 신입이니 그럴 수 있다’고 참을 인을 세기며 다시 한번 설명했다.
반면, 그는 동기와 아주 조금은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이미 나는 1달간의 교육을 통해 회사의 사업 모델이나 조직, 해야 할 업무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는 머릿속에 집어넣은 상황이었고, 그 틀 안에서 상사가 시킨 업무내용도 벗어나지 않았다. 아주 조금의 응용력과 문서스킬이 필요할 뿐이었다. 난이도는 신입에게 시키는 일인 만큼 높지 않았으며 기한도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까지 해야 할지 여쭤보고 그냥 빠르게 마무리하면 좋다는 말에 그날 오후 대략적인 초안을 작성하여 상사에게 전달했다.
“음.. 이 부분만 조금 고치면 되겠네. 괜찮은데?”
“네 알겠습니다 그럼 금일 퇴근 전 마무리하여 수정안 공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자리로 돌아가 지적받은 내용을 살펴보며 얼마나 시간이 소요될지 계산하였다. 그리고 시간은 오후 2시였다. 일을 마무리하고도 3시간 40분은 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 업무 첫 주 시작된 것이다.
신입에게 시킬 수 있는 업무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팀장과 과장은 본인의 일을 처리하느라 신입에게 신경 쓸 틈이 없었고, 사수 또한 여유가 있다고 해도 본인의 일을 신입에게 맡기는 일은 심적으로 그리고 사내정치의 관점에서도 맞는 행동이 아니었다. 사실 신입이 들어오기 전에도 업무와 팀은 잘 돌아갔으니 신입에게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에 가까웠다. 그래서 보통은 중요하지 않지만 처리해야 할 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지만 하면 좋은 일들을 신입에게 맡기고 간접적으로 일을 배우게끔 유도하지만 그러한 일도 무한정 쌓여있지는 않다. 그러니 업무가 끝나면 신입은 일이 없는 것이다. 그게 회사의 생리였다.
일주일이 지나고 퇴근 시간이 다가올 무렵, 옆 동기의 눈빛을 보니 이미 그의 동기는 퇴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수에게 혼나 눈꼬리는 내려갔지만 약간은 광기가 느껴질 정도로 눈망울은 열정이 가득 담겨있었다. 마치 이 시련을 극복하면 혁명에 성공하여 검투사 노예 신분을 벗어나 자유를 쟁취할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는 모니터에 띄어진 창을 모두 제거하고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며 팀의 분위기를 살폈다. 동기가 아닌 또 다른 옆자리의 사수가 신입은 퇴근할 때 눈치 보는 거 아니라고 누구의 눈도 마주치지 말고 입구로 걸어가라 말했다. 나는 용기를 얻어 가방을 챙기고 인사를 하며 회사를 나왔다. 그는 퇴근하며 뿌듯함 보다는 어떻게 또 시간이 흘러갔구나.. 하는 안도감을 가슴에 품고 지하철에 올랐다.
그녀는 처음 출근하는 2명의 신입을 보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여러 의미에서 정상적인 사람이 내 부사수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속으로 하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처음 입사한 3년 전, 그의 사수는 약간은 소시오패스와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다른 팀에서, 그리고 인사팀에서 항상 좋은 고과를 얻어 빠른 승진을 이어가던 그였지만, 같이 일하는 입장에서는 월요일에 사고라도 일어났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상사였다.
태도는 매우 정중해서 남들 눈에 띄는 빌런은 전혀 아니었지만, 당하는 사람이 당황할 새도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자존심을 긁는 말과 행동을 하는 타입이었다.
“쓰읍.. 이번에 팀장께서 저와 부사수님께서 해보라고 하신 프로젝트인데 일단 읽어보시고 이해가 안 되거나 못할 것 같은 부분이 있다면 사전에 말씀해 주세요. 업무 분담은 임의로 제가 지정했으니, 그 부분도 이의제기가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시고요”
회사에서 꽤 큰 프로젝트라도 진행하나? 이걸 대리급이랑 사원급한테?라는 생각을 하며 펼쳐보니 프로젝트라고 부르기 애매한 평범한 업무였고 내 분량도 생각한 수준보다 훨씬 적었다. 상사에게 충분히 이해되었고 오히려 더 많이 맞기셔도 된다고 말했더니 한숨을 쉬며
“이 프로젝트는.. 음.. 아 아니에요. 그러면 이 부분만 추가해서 진행해주세요. 맡길게요”
하며 고개를 모니터로 돌렸다. 업무가 끝난 이후에는 당연하게도 별게 없었고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일을 하면서도 찜찜한 마음에 조금 더 꼼꼼하게 살폈지만 아무 일도 없었고,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사수가 애초에 업무에 대한 자부심과 남들에 대한 불신으로 소위 본인 외 모든 직원들을 자신 아래로 보는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 일한 2년간 자존심은 바닥이 아닌 무릎과 허리 사이 그 어딘가로 떨어졌고, 업무 성과는 허리와 어깨 그 사이 어딘가로 평가받았다. 아주 다행히도 최근 사수는 고과와 사내 평판이 임원의 귀에도 들어가 소수정예의 전략기획팀으로 부서를 이동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신입이 들어온 것이다.
그의 첫인상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눈에 띄지 않은 외모(누군가에게는 수요가 있겠지)와 단정한 옷차림, 예의를 갖춘 태도와 어투로 일을 가르치면서도 전혀 스트레스는 없을 것 같은 인상이었다. 이상함을 느낀 건 2주가 되지 않아서였다.
그는 일을 지시하는 순간에는 침묵을 유지했고, 중간중간 설명이 부족한 부분에서는 어김없이 질문이 이어졌다. 메모는 하지 않았지만 빈틈은 없었고, 마지막엔 항상 본인이 이해하고 있는 방향이 지시내용과 동일한지 정리하여 질문하며 미팅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자리로 돌아가면 예상한 시간보다 아주 일찍 초안이 완성되어 내 자리에 놓여있었다.
설명을 위해서 같이 입사한 동기와 비교하면, 일을 월요일에 시켜 최종보고서를 금요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일이라면, 내 부사수는 월요일 퇴근 전에(사실 퇴근 전도 아니다. 4시쯤 보고서를 공유하고 5시 – 5시 30분 사이에 여유되는 시간에 피드백 미팅을 요청했다) 80% 이상 완성된 초안을 가져왔다.
그의 동기는 언제나 마감직전(물론 정해진 마감은 없지만) 금요일 퇴근 직전 5시 50분에 사수에게 본인이 만든 보고서를 공유했고, 그녀는 뿌듯한 마음으로 활기찬 안부 인사와 함께 퇴근했다. 보고서를 받은 사수만이 덩그러니 남아 미간에 주름을 남기며 부사수가 남긴 보고서를 넘겼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다 보니 금요일까지 마감해야 하는 업무량을 주었음에도 이상하게 신입은 수요일이 되면 일이 없어졌고, 그녀는 목요일 아침만 되면 본인이 해야 할 일의 정리와 함께 신입에게 무엇을 시킬지 고민이 많아졌다.
그녀는 개인 컴퓨터의 업무기록을 찾아보며 본인의 신입 시절을 떠올렸다. 분명 그 싸가지 사수가 신경을 긁긴 했어도 잘못된 지시를 하거나, 과도한 업무량을 주거나 또 그렇다고 신입이 쉴 정도의 적은 업무량을 주지는 않았다. 내가 그 신입에게 주는 업무량을 누가 옆에서 지켜본다면, ‘야 너 그 신입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적당히 시켜’라고 질책할 수준의 업무량이었다. 그녀도 처음에는 이렇게 일을 시킬 계획이 머릿속엔 없었다.
그녀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본사에 협업을 제안한 몇 개 기업의 검토를 신입에게 맡겼다. 물론 억 단위의 투자검토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업에 대한 이해도와 시장 리서치 능력, 그리고 여부를 결정하는 통찰과 의견을 설득하는 논리력이 필요해 귀찮고 많은 업무량에도 불구하고 신입에게는 시키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내 업무지시를 듣더니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자리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할 수 있겠어요?”
“….”
“하라고 시키신 일이나 해야.. 겠죠?”
그녀는 이유 모를 한기와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인상을 느끼며, 혹시나 일이 어렵거나 이해가 안 된다거나, 업무량이 과도하거나 하면 언제든 본인에게 이야기하라고 말한 뒤 그제야 신입을 놔주었다.
그는 처음에는 이 상황이 마냥 즐겁진 않지만 그렇다고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게으른 성향이었던 그는 해야 하지만 하기 싫은 일이라면 한없이 하기 싫어 마감일까지 최대한 하기 싫어하다가 끝에는 정말 안 해 문제가 생기거나, 정말 꼭 해야 하는 일이라면 마감에 쫓겨 마무리하기도, 아니면 애초에 일이 시작되자마자 끝내고 남은 기간을 아무것도 안 하고 뒹굴며 시간을 때우는 스타일이었다.
그런 그였기에, 일이 주어지면 나름대로 빠르게 끝내려 노력했고, 다행히도 그가 마음먹으면 빠르게 끝낼 수 있는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직장과 대학생의 차이는 대학생은 일이 끝나면 게임도 하고 책도 보고 술을 마시러 나가기도 하지만, 직장인은 일이 끝나도 회사에 출근해야 하며 퇴근시간까지는 일이 없어도 그 자리를 고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단순한 차이가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나름 신입으로 입사하여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야 할 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면 그것 나름대로 이상하니 일하는 척은 해야 했고, 그렇다고 컴퓨터로 뭘 하자니 모니터의 시야각, 인트라넷 등 제한이 너무 심했다. 그래서 일이 일찍 끝나면 고통의 시간이 다가온다는 것을 일찍 깨달은 그는 최대한 일을 천천히 마무리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결과의 퀄리티는 점점 신입의 수준을 벗어났고, 숙련도는 쌓여 업무 속도는 더욱 빨라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했다.
옆 같이 입사한 동기는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밥먹듯이 야근을 하는데, 퇴근시간만 되면 슬슬 자리를 정리하는 본인 모습에 조금은 반성을 하려고 해도 상황이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고 일을 더 달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상황이라는 것은 그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 이어지던 도중 그도 벅차 보이는 업무를 지시하는 상사가 아닌가!
그는 막막함과 안도감이라는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감정을 동시에 느끼며 자리로 돌아가 무엇부터 해야할지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사수 그녀도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나?’라고 생각하며 죄책감을 속으로 삭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