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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n Nov 01. 2018

엄마의 : 형부

이모부의 빈 자리

56년생 평범한 우리네 엄마.
어머니가 쓰시는 글을 대신 소개합니다.
부디 어머니의 글로 메마른 일상에
촉촉한 단비가 내리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내일 약 20일간의 일정으로 미국-멕시코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떠날 때면 언제나 기대와 설레임으로 마음이 부풀어 오르곤 하는데 이번엔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늙은 남편을 혼자 두고 장기간 집을 비우게 된 것도 마음이 썩 편친 않지만, 그것보단.
이번 여행은 돌아가신 형부가 주신 선물 같아서, 아니 형부가 가셔야 할 걸 내가 대신 가는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하다 할까.

2011년 5월 7일,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시계를 보니 새벽 두 시를 조금 넘고 있었고 발신자는 언니였다. 순간 불길한 느낌이 들어 가슴이 철렁했다.
말기암으로 투병 중이신 형부의 상태가 좋지 않아, 문병을 다녀온 게 불과 두어 시간 전이었다.
왜, 나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야..........
형부 죽었다!"
마치 전혀 모르는 남의 얘기하듯.
앞뒤 설명도 없이 단 두 마디로
형부 소식을 전하는 언니 목소리는, 잘못 들은 게 아닌가 귀를 의심할 정도로 지나치게 차분했다.
꿈에도 예기치 못했던 형부의 죽음에 얼이 빠진 듯, 이상하리만큼 담담한 언니의 태도는 내 심장을 더 오그라들게 만들었다.
도무지 믿고 싶지 않은 이 상황이 나쁜 꿈이라면, 어서 빨리 깨어나고 싶었다.

형부가 돌아가시다니!
언니 넋이 나가고도 남을 만한 일이었다. 위암 말기이긴 했지만 형부는 지난 1년간 상당히 호전되고 있었고, 담당의사도 상당히 희망적인 얘기를 해오던 터였다.
일이 벌어진 그날도 아파서가 아니라 단순히 경과를 체크하러 병원에 갔었고, 형부는 제 발로 씩씩하게 갔을 만큼 몸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Mri 촬영 도중 생긴 구토의 토사물이 기도를 막았고, 환자의 상태를 면밀히 살피지 못했던 의료진의 실수로 형부는 급작스런 의식불명에 빠지게 되었다.

비록 의식을 회복하진 못했지만 자정 무렵 모든 바이탈이 안정적으로 돌아왔고, 의료진도 고비는 넘겼다며 안심하라 했다. 그래서 한시름 놓았다며 나와 조카는 집으로 왔었고, 병상 옆에서 잠시 눈을 붙이던 언니가 느낌이 이상해 살펴보니 이미 돌아가신 뒤였던 것이다.
그러니 청천벽력처럼 그렇게 형부가 급작스레 돌아가실 줄은, 언니뿐 아니라 우리 모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형부 연세 겨우 63세 되던 해였다.

매사 조용조용 말수가 적고 예의범절을 중시하던 형부는, 선비처럼 점잖은 분이셨다. 자칫 차갑다 생각될 만큼 쉽사리 곁을 안주는 사람이었지만, 본인은 웃지도 않으면서 주변을 박장대소케 만드는 유머감각과 위트가 있는 분이기도 했다.
아는 것도 어찌나 많았던지.
세간에 유행하던 허접한 농지꺼리부터 지적이고도 고차원적인 대화에 이르기까지, 잡학사전처럼 만사 뭐든 막히거나 모르는 게 없었다.
우리나라 유통계의 전설적인 인물로 회자될 만큼 사회적으로도 성공했고, 형부 기일이면 산소를 찾는 친구들이 여태껏 있는 걸로 봐선 대인관계도 좋았던 것 같다.
그림도 잘 그렸으며 노래 솜씨도 수준급, 특히 형부가 즐겨 부르시던 '검은 장갑'이나 '그대 그리고 나'는 정말 일품이었다. 한마디로 멋쟁이셨다.

하지만 형부는, 남녀평등 내지는 여성의 사회참여가 당연시되던 시대에 걸맞지 않게 고리타분한 사람이었다.
형부가 생각하는 '여자'란 모름지기, 나대거나 튀지 않아야 하는 건 물론. 남자들 그림자도 밟지 않던 옛날 여인네들처럼, 매사에 있는 듯 없는 듯 그저 참하고 조신해야 하는 존재였다.
가부장적이고도 고루하기 짝이 없는 형부의 사고방식은 내 스타일이 아니었고, 나는 구시대적인 생각을 가진 형부가 늘 못마땅했다.
아나운서였던 언니를 들어앉혀 시어른 시집살이뿐 아니라 옴짝달싹 숨도 크게 못 쉬게 꽉 틀어쥐고 살았으니, 처제 입장에서 형부가 어찌 이쁠 수만 있었겠나.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형부는 늘 어렵기만 한 사람이었다.
다른 집 형부들은 처제랑 친하게 지내면서, 농담 따먹기도 하고 용돈도 척척 준다더만. 나는 친한 건 고사하고, 형부 앞에선 말 한마디도 늘 조심조심 신경 써야 했다. 7살 손아래 처제에게, 돌아가실 때까지도 하대를 안 하셨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형부한테 용돈 같은걸 받는다는 건 생각도 못 해봤고, 어릴 땐 그걸 두고 툴툴대기도 했었다.

한밤 중에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간호사들도 경황이 없었던지, 내가 도착했을 때까지도 형부는 병실 침대에 누워 계셨다. 곤히 주무시듯 아주 편안한 얼굴로 말이다.
충격이 컸던 언니와 조카는 울지도 못한 채 그냥 멍하니 앉아있었다.
나는 놀란 마음을 다잡고, 조카를 시켜 형부가 덮고 있던 시트를 형부 얼굴에 씌워 드리면서 엉겁결에 형부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마음을 다해 약속했다.
"제가 언니 잘 돌볼 테니, 아무 염려 말고 천국가시라..."라고.

언니랑 형부는 눈꼴이 실 정도로 정이 좋았다. 언제고 형부가 먼저 돌아가시면 언니도 따라 순장할 거라는 농담을, 다 늙어서도 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 남편을 너무도 급작스레 제대로 된 말 한마디 못 나눠보고 떠나보낸 언니는, 오랫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
내 남편이 살아있다는 게 미안하고 눈치가 보일 정도로, 언니의 슬픔은 깊고 깊었다.
나는 형부의 마지막 순간에 언니 걱정은 마시라 약속했지만, 언니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세상에 굴러다니는 흔해빠진 위로의 말들은, 그저 하기 좋은 말 그 자체일 뿐. 그깟 말 몇 마디는, 정작 슬픔에 빠진 당사자들에겐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했다.
언니는 수면제 없인 잠을 못 이뤘고, 정신과 상담치료를 받는 중에도 날마다 눈만 뜨면 죽어버리겠단 소릴 달고 살았다.
언니를 다독이고 위로하던 나는,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언니한테 서서히 지쳐갔다. 어느 날인가는 죽어버리겠다며 흐느끼는 언니를 향해, 그렇게 계속 힘들게 할 거면 차라리 암말 말고 조용히 죽어버리라 소리치기도 했다.

한탄을 들어주기만 하던 나도 그리 힘들었는데, 황망 중에 사랑하던 남편을 잃은 언니의 비통함과 상실감이 어떠했을지.
그 누가 감히 그 마음을 '안다'거나, '이해한다' 할 수 있겠으며, 세상 무엇으로 그 아픔과 상처를 덜어줄 수 있었을까. 당사자가 되어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어떤 누구도 그 마음을 진정으로 온전히 헤아리진 못하리라.
형부가 가신지 6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언니는 반드시 주 1회 형부 산소를 찾아가지만.
세월이 약이라던가.
시간이 흐르자 언니도 안정을 찾아갔고, 나도 꿈에서 딱 한번 형부를 뵌 뒤론 그간 형부를 잊고 살았다.

지난봄, 형부의 유산인 청담동 주택이 생각지도 못한 비싼 값에 팔렸다. 값을 잘 받은걸 한턱내겠다며, 언니가 여행비 전액을 부담할 테니 함께 여행을 떠나자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신난다~" "웬 떡이냐~" 보단, 왜 그렇게 가슴이 아픈 건지...  
통 크게 쏘겠다는 언니가 너무너무 고마우면서도, 고마운 마음에 앞서 돌아가신 형부 생각에 마음이 시려왔다.

퇴직 후 불과 2~3년 뒤 발병한 형부는 여느 직장인들처럼 일만 열심히 하셨을 뿐, 제대로 누리질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재산도 남 부럽지 않게 있었고 자식들도 잘 자랐으니, 이제 마음껏 여유롭게 즐기시기만 하면 되는 참이었는데...
형부가 살아계셔서 내가 아니라 두 분이 함께 이번 여행을 떠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집안의 어른으로서, 꼿꼿하고도 든든하게 어느 자리에서건 중심을 잡아주셨던 형부.
나직하게 내뱉는 말 한마디, 가만히 내리깐 눈빛만으로도 좌중을 압도하시던 형부.
그딴 거 절대 안 하는 무지무지 깐깐한 분이셨는데도, 내가 부업한다 나섰을 때 목 좋은 상가 입찰을 받을 수 있도록 선뜻 뒤를 밀어주셨던 형부.
멀리 있는 친정 대신, 툭하면 아이들 데리고 언니 집서 치대고 자고 가곤 했어도. 언제나 온화한 미소로 반겨주시던 형부가... 새삼 그립기만 하다.

만약 형부가 살아계셨더라면, 나도 이젠 환갑을 넘겼으니 전처럼 형부를 마냥 어려워만 하진 않을 것 같다.
그러니.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때가 어느 땐데, 제발! 울 언니
쫌 자유롭게 풀어주시라~ 틱틱거리며 핀잔도 주고.
술고래로 울 언니 속 썩이는 거, 도대체 언제까지 하실 거냐~ 겁 없이 쫑크도 놓으면서 함께 늙어갔음 좋았을 텐데....

어렸을 때 형부한테 용돈 한번 못 받았다 궁시렁거리긴 했었다만.
소소한 용돈 몇 푼에 비길 수 없을 만큼 이자까지 넘치도록 얹어, 다 늙어 이렇게 큰 선물을 받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형부!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덕분에 잘 다녀올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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