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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n Nov 14. 2018

엄마의 : 사주팔자

책 좋아하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그리고 손자

56년생 평범한 우리네 엄마.
어머니가 쓰시는 글을 대신 소개합니다.
부디 어머니의 글로 메마른 일상에
촉촉한 단비가 내리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첫 손자가 태어났을 때 이름 지으려고 손자 사주를 보신 친정아버지께서, "그놈 사주, 지 외할배 똑 닮았더라!" 하셨다.

그 말씀에 나는 화들짝 놀라 "아이고오~ 안됩니더. 김서방 닮으믄 우짜라꼬예" 했더랬다.

못 말리는 낭만파인 데다 사람 좋아하고 술고래에 돈 욕심도 전혀 없는 남편 닮았다간, 큰일 나지! 암, 안되고 말고!


작년 이맘때 유치원서 주는 '독서 상장'을 손자가 받아왔길래 동네방네 자랑질을 했었는데, 올해 또 그걸 받았단다.

그래서 다른 애들도 다 번갈아가며 주는 거 아니냐 물었더니, 딸아이가 펄쩍 뛰면서 절대 그렇지 않단다.

상을 받은 게 신이 나서 상장을 들고 눈이 안 보일 정도로 웃고 있는 손자 사진을 보니, 참 기특하고 감사하단 생각이 든다.


남편은 문자 중독이라 할 만큼 책벌레이다.

아파트 8층에 살 때 잠시 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책을 읽곤 해서, 동네 아줌마들이 그 댁 남편 뭐하는 사람인데 그렇게 책을 손에서 놓지 않냐 묻기도 했었다.

그런 사람이다 보니 식탁에선 말할 것도 없고 가족끼리 외식할 때 조차도 책을 봐서, 그럴라믄 왜 왔냐며 화를 내고 나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남편의 그런 모습들이 모두가 좋았던 건 아니지만, 독서 상장을 받은 손자를 보니 남편의 책사랑만큼은 손자가 반드시 닮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그리고 우리 집에 올 때면 늘상 책 읽어달라던 손자가 때론 귀찮기도 했는데, 이제 보니 제 할애비 닮을 거란 아버지 말씀이 전혀 틀린 말도 아닌 것도 같다.


어릴 때 우리 집은 상당히 가난했다.

중학교에 입학하니 특별활동반을 정해야 했고, 나는 처음에 뭔가 멋져 보이는 테니스반에다 신청을 했다.

그리고는 특별활동 첫 시간에 테니스반이 모이는 교실로 갔더니, 선생님께서 칠판에 준비해야 될 물품을 적어 주셨다.

준비물은 테니스 라켓, 큐롯 스커트, 테니스화, 테니스공 등등이었는데, 라켓은 어디 것이 좋고 신발은 어쩌고 저쩌고. 아이들이 떠드는걸 가만히 들어보니 그중 하나만 산다 해도 값이 만만찮을 것 같았다.

그걸 다 준비하려면 우리 집 형편으론 어림없는 일이었다.


만약 교육열이 누구보다 높으셨던 부모님께 말씀드렸다면, 딸 기죽지 않게 하시려고 빚을 내서라도 어떻게든 준비해 주셨을 테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조용히 담임교사를 찾아가 테니스반은 아무래도 적성에 안 맞는 것 같다며, 도서반으로 바꿔달라 말씀드렸다. 도서반은 도서관리만 한다 하니, 재료비 등 돈이 한 푼도 안 들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식으로 원치 않게 도서반을 하게 됐지만, 도서반을 했던 삼 년 동안 무협지에서부터 세계명작에 이르기까지 정말 많은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었다.

겨우 열세 살에 그런 결정을 혼자 내렸을 만큼 지나치게 철이 났던 게 한편으론 안쓰럽고 짠해서,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파온다.

하지만 나는 그때의 그 선택이, 내 삶을 좌우하는 아주 중대한 결정 중 하나였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기본 사고(思考)의 틀이, 그때 읽었던 수많은 책들을 통해 갖춰졌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남에게 크게 손가락질받지 않고 나름 자긍심을 가지고 사는 '지금의 나'를 만든 기반 역시도, 책을 읽으면서 다져졌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이쁘디 이쁜 손자에게, 마음 같아선 별도 달도 다 따다 주고 싶다.

하지만 나는 가진 게 많지 않아 겨우 내 앞가림만 할 수 있을 정도이고, 손자에게 물려줄 땅덩어리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다.

또한 사위 녀석도 그저 평범한 직장인이니, 앞으로 대한민국 평균치의 교육 정도만 손자에게 시킬 수 있을 것이다.


세상 모든 부모들이 겉으로는 다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외치더라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거 다 헛말이다. 자식 낳아 어느 정도 길러 막상 자신의 눈앞에 닥치게 되면, 인간의 욕심이란게 그런 게 아니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겨우 일곱 살인 손자를 볼 때마다, 아니 손자가 자라는 내내. 물질적으로 넉넉한 다른 집의 아이들처럼, 고퀄리티의 다양한 교육을 시킬 수 없는 여건 때문에 마음이 아려오곤 했었다.


그래서 나는, 나 나름대로 욕심을 내어보기로 했다.

사주 같은 거 썩 그리 믿는 편은 아니다만, 손자의 사주가 외할아버지를 닮았다는 친정아버지의 말씀에 기대를 걸어보려 한다.

문자 중독이라 할 만큼 책을 좋아하는 외할아버지를 닮아, 손자가 앞으로도 계속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라가 기를 바라보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다양한 책을 통해 지식을 넓히고 세상을 배워, 품성이 따뜻하고 지혜로우며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으로 손자가 자신을 잘 다듬고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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