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있는 시간을, 줄어가는 시간을 부여잡고 싶어서
56년생 평범한 우리네 엄마.
어머니가 쓰시는 글을 대신 소개합니다.
부디 어머니의 글로 메마른 일상에
촉촉한 단비가 내리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오랜 세월을 함께 산 부부는 닮는다고들 한다. 내후년이면 결혼 사십 주년을 맞게 되는 우리 부부도, 게으르고 노는 거 좋아한다는 점에선 갈수록 점점 더 닮아가는 것 같다.
며칠 전 '부부는 닮는다'는 것과 관련된 글을 읽다, 문득 남편의 옛날 별명이 떠올랐다.
부부는 닮는다는 게 맞다는 전제하에, 남편의 별명이 요즘 내 상황과 어찌나 그럴듯하게 어우러지는지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학창 시절 남편의 별명은 만풍거사(晩風) 였다는데, '만풍'의 정확한 의미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1. 나이 들어서 뒤늦게 시작하는 방탕한 행동.
2. 나이 들어서 뒤늦게 무엇인가에 열중함.
어찌 됐든 둘 다 '나이 들어 뒤늦게' 뭔가에 꽂힌다... 다시 말해 늦바람이 난다는 건데, 남편에게 붙여진 '만풍'이 둘 중 어느 경우에 해당하는지 정확한 건 알 수가 없다. 그 별명을 말해줬던 남편의 절친 현수 씨가 이미 세상을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만약 2의 경우라면 꽤나 바람직한 일이겠으나, 설사 1의 사유로 그런 별명이 붙었다 할지라도 다 늙은 지금에 와서 그걸 끄집어내자는 건 아니다.
최근에 나는 강의 듣는 재미에 푹 빠졌다.
이런저런 강의를 들으러 다니는 게 어찌나 재미가 있는지, 강의시간 내내 지나치다 싶을 만큼 몰입하곤 한다.
대부분의 경우 강의는 대략 두 시간 가량 진행되는데 마치 귀가 아닌 온몸으로 강의를 듣는 것처럼, 거의 얼음땡에 가까운 자세로 꼿꼿이 몸을 곧추 세운채 강의에 초집중하는 것이다.
학창 시절에도 이렇게나 집중해서 강의를 들었던 기억은 없다 보니,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거지?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고 이런 내가 스스로도 놀라울 지경이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지금처럼 했더라면, 아마도 내 인생이 열두 번은 바뀌었겠다 싶을 정도로 열심이니 말이다.
물론 집중했다는 말이 무색할 지경으로 강의실을 나오는 그 즉시로 머릿속이 하얗게 되면서 죄다 잊어버리긴 한다만, 강의를 듣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말할 수 없이 행복하다.
사실 나는 학창 시절 내내 '공부'와는 거리가 먼 학생이었기 때문에, 다 늙어 뒤늦게 '배움'에 빠져버린 게 실은 적응이 잘 안된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땐 입시를 치렀는데, 입학시험을 치러가니 모르는 문제가 하나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All 100이 분명하니 아마도 수석합격할 거 같다며, 부모님께 인터뷰 준비나 하시라며 시건방을 떨었더랬다.
하지만 수석은 무슨, 기대와는 달리 그런 꿈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선 단 세명만이 우리 학교에 입학했으므로, 적어도 공부에 관한 한 나는 기세가 등등했다.
그땐, 그 뒤로 쭈욱 내가 공부에 담을 쌓게 되리란 걸 꿈에도 알지 못했다.
전국 각지의 초등학교에서 상위권을 유지하던 나의 동급생들은 너무나 뛰어났고, 입학 후 첫 시험을 본 뒤 받아본 성적표는 나를 충격에 빠트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6년 내내, 나는 아무리 죽어라 공부해도 단 한차례도 상위권에 포함되지 못했다.
그러니 해도 해도 안 되는 공부를 놓아버릴 수밖에 없지 않았겠나.
대학 졸업할 때 어찌어찌 우등상을 타긴 했지만 그건 내가 공부를 잘해서가 아니라, 다른 아이들이 나보다 더 공부를 안 해서 받은 거였다. 왜냐면 나 역시도 연애하느라 솔직히 말해 공부는 뒷전이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요즈음처럼 뭔가를 배우는 것이 마냥 즐거운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라인댄스도 그렇고 숙제도 많고 재봉질이 잘 안돼 골이 지끈거리는 양재도 너무너무 재미있지만, 그중에 제일은 역시 각종 강의를 듣는 거다.
그래서 강의 듣는 게 다른 것 대비, 왜 그렇게 월등히 더 재밌을까? 곰곰 생각해 보았다.
나는 그동안, 무엇이든 배울 땐 꽤나 열심히 하는 편이긴 했다.
볼링을 배울 때는 완벽한 폼으로 멋지게 공을 굴리려고 (잘 미끄러지기 위해) 양말까지 챙겨 신은 채, '하나 둘 셋!'을 외치며 스르륵 앞으로 미끄러지는 연습을 거실에서 수백 번 했더랬다.
골프를 시작했을 때에도 레슨프로가 비디오 교본 찍어도 되겠다 했을 정도로 한때는 완벽한 스윙을 구사했었었고, 그러기 위해서 무진장 열심히 노력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런 것들은 남들보다 더 잘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내 뜻대로 안 되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들이었다.
그렇지만 요즈음 듣는 각종 강의는 시험으로 순위를 매기는 것도 아닌 데다, 내가 아는지 모르는지... 듣고 돌아서는 순간 바로 까먹거나 말거나 누가 뭐라지도 않으니 아무런 부담이 없다.
덧붙여 뭔가 배운다는 지적 성취감까지 얻을 수 있으니, 어찌 좋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뒤늦게 내가 강의에 꽂혀 버린 게 '만풍'을 별명으로 가졌던 남편을 닮아 늦바람이 났다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길 억지로 갖다 붙이려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쓸쓸해지고야 만다.
정말 늦바람이라도 난 듯!
할 수만 있다면 하루도 빠짐없이 뭔가를 배우고 보러 다니고 싶은 내 마음이, 실은 그저 시간에 쫓기는 나의 초조함 때문이란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뭔가에 늦바람이 났던 사람들 또한, 그들에게 남아있는 시간이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갈수록 줄어든다는 자각 때문에... 뭐라도 부여잡고 싶어서 더 그랬던 건 아니었을까.
여름에 들었던 백제사 강의에 이어, 전에는 1도 관심 없던 백제 관련 다른 강의를 지난 두 달여 동안 또 들었다.
두 달간 뭘 들었는지 기억나는 건 거의 없는데도, 안 빼먹고 부지런히 다녔더니만 일종의 개근상인 수료증을 주길래 받아왔다.
상을 받았는데도 마음이 더 가라앉는 건 어찌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