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세움 경험

by 금세윤

로마 행 비행기를 놓쳤다. 당연히 그곳인 줄 알았던 탑승구가 아니란 걸 알았을 땐 이미 너무 늦었다. 헐떡이며 원래 가야 했던 탑승구로 뛰어갔지만, 비행기는 이미 문을 닫은 후였다. 해외여행이 처음도 아니었는데 어이없는 실수였다. 공항엔 출발 시각보다 2시간 일찍 도착했었기에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Image by Jan Vašek from Pixabay

몇 년 전 교환학생으로 떠난 마드리드 공항에서 일어난 일이다. 10여 일간의 부활절 휴일을 앞두고 며칠을 고민하며 여행 스케줄을 짰다. 이미 예약한 숙소, 다음 교통편, 입장권 등 머릿속에 떠오른 것만 해도 이번 여행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수십 가지였다. 무엇보다 다른 친구들은 이미 떠난 마드리드 시내에서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부여잡고 로마로 가는 다른 항공편을 검색했다. 결국 원래 예약했던 항공편보다 몇만 원 더 값을 치르고 로마로 떠날 수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로마라는 행선지만 생각하고 마음만 급했던 나머지, 새벽 도착 비행기 티켓을 산 것이다. 애매한 새벽 시간이라 공항에서 숙소가 있는 시내로 갈 버스 편이 없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닫자, 헛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그렇다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동양인 여자 혼자 택시를 타고 악명 높은 로마중앙역에 가는 건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험악한 로마의 치안에 대해선 익히 들었기 때문이다. 비행기 티켓도 새로 사는 등 계획에 없던 지출로 이미 주머니 사정도 여의치 않았다.


공항 벤치.jpg Photo by Claudio Schwarz | @purzlbaum on Unsplash

결국, 첫차 시간인 새벽 5시 반까지 공항 벤치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좋게 말해 기다리는 것이지, 사실상 노숙이었다. 몸에 지니고 있는 현금을 누가 빼앗아 갈까 불안했고, 나 자신의 안위도 걱정돼서 뜬 눈으로 꼿꼿이 앉아 핸드폰의 작은 화면만 들여다봤다. 그렇게 몇 시간 흘렀을까. 적막한 공항엔 시끄러운 청소기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공항 청소 시간이구나. 공항 직원들은 나 같은 (공항에서 노숙하는) 사람은 으레 보는 양 개의치 않는 듯했다. 나 혼자 좌불안석, 부끄러워하며 새벽 시간을 공항에서 견뎌내고 첫차를 탔다. 밤은 꼴딱 지새웠지만, 미리 세워 둔 일정대로 움직이려면 쉴 수 없었다. 허름한 숙소에 짐만 던져두고 몽롱한 정신으로 먼저 콜로세움 역으로 향했다.


뻑뻑한 눈을 비비며 본 콜로세움은 지난 새벽의 고통을 치유해 주는 듯했다. '영화에서 본 적이 있던가, 아님 책이었나, 거기서 봤을 때보다 훨씬 크네, 내가 진짜 로마에 왔구나.' 멍하니 서서 무의식 저편의 기억을 찾는 것처럼 두서없이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남부 유럽을 여행하며 가장 좋았던 게 뭐냐고 물으면, 높고 청량한 하늘과 내리쬐는 밝은 햇빛, 따뜻한 날씨라고 답하곤 한다. 큰 콜로세움을 내리 덮은 햇살과 주변의 푸른 경관, 적당히 따뜻한 날씨, 관광객들의 들뜬 분위기가 아직도 사진처럼 머릿속에 박혀 있다.

mathew-schwartz-s87bBFZviAU-unsplash.jpg Photo by Mathew Schwartz on Unsplash

콜로세움의 웅장함과 로마 구시가지에서의 여유로운 산책은 지금도 나를 지탱해주는 한 부분이 돼 주고 있다. 상사의 갈굼에도 나의 자존감이 무너지지 않는 건 '콜로세움 경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아, 고되다' 싶으면 언제든지 꺼내 보면서 미소 짓고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경험이 내겐 있는 것이다. 한여름 그라나다 동굴에서의 플라멩코, 비 오는 밤의 런던 뮤지컬, 처음 만난 여자들과 함께 본 산토리니의 주황빛 석양 같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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