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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세윤 Apr 07. 2021

퇴사를 참는 법

이제 막 입사해서 사회생활의 첫걸음을 내딛는 사람은 종종 '신입병'이라는 걸 앓는다고 한다. 신입병이란, 신입사원이 앓는 병으로, 식욕이 저하되고 이유 없이 몸이 아픈 병이다. 소문으로만 듣던 병이 내게도 여지없이 찾아왔다. 입맛이 없어 몸무게가 10kg 정도 감소했고 이유 없이 장염에 자주 걸려 화장실 변기를 붙잡고 토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입병이 심하게 나서 약을 처방받았는데, 그 약으로 눈이 빨갛게 부어올라 몰랐던 약 알러지를 발견하기도 했다.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진료실 의자에 앉아 의사가 불러주는 영문 모를 약 이름을 받아 적고 있었다.

Photo by little plant on Unsplash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책 제목처럼 '퇴사하겠습니다'가 매일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쓰게 삼켰다. 그 말을 무심코 내뱉는 날엔 과거 2년간 겪은 취준 지옥으로 되돌아갈 것이고, 그건 생각만 해도 무척 잔인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어쩌면 내가 너무 쉽게 관두는 '요즘 것들'은 아닌지 자문하며 버텼다.


 어느 날, 내 옆에서 공기청정기가 열심히 돌아가고 있는데도 어쩐지 사무실 공기가 탁한 것 같아 숨이 턱턱 막혔다. 그때 갑자기 출근할 때 본 L카페가 생각났다. L카페는 서울역사 지하에 자리 잡고 있는데, 서울역 근처에서 일하는 회사원들은 가지 않을 법한 장소에 있다. 사방이 꽉 막힌 사무실에서 온종일 근무하는 직장인이라면, 점심시간만이라도 볕이 잘 드는 지상의 카페에서 한숨 돌리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L카페는 냄새나는 서울역 지하를 걸어가야 나오는 곳으로, 햇빛이 들지 않아 조금 어두웠다. 그 칙칙함은 내가 느끼던 감정과 결이 같아 내겐 오히려 안정감을 줬다. 그리고 카페 유리창 밖 풍경이라곤 열차를 타려고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내리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카페엔 회사원보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 귀대하는 군인, 고향에 내려가는 사람으로 붐비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나를 모르는, 오늘 하루만 볼 사람들이었다. 익명성이 보장된 셈으로, 내겐 가장 안전한 점심시간의 도피처가 됐다. 처음 몇 번은 회사에서 울컥하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가 그곳 구석에서 혼자 조용히 터뜨렸다. 그다음엔 종이와 펜을 챙겨 가 내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을 끄적이기도 했다.

Image by Engin Akyurt from Pixabay

 그해 봄엔 ‘그래, 회사가 여기만 있는 건 아니지’하며 채용공고를 뒤지고 그곳에서 자소서를 새로 쓰곤 했다. 몇 번의 고배를 마시고 여름이 되자 회사원 그 자체가 나와는 안 맞는 것 같아서 프리랜서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일-한 번역가가 되려고 학원 교재를 들고 가서 단어를 외웠다. 한일 관계가 악화일로로 들어서던 가을엔 차라리 직무를 살려 세무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세무회계 교재를 챙겨가 쌀집 계산기를 두드리며 연습문제를 풀었다. 그렇게 점심시간마다 찾아가다 보니 하루는 내 얼굴을 익힌 카페 알바생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 맞으시죠?’ 하고 먼저 메뉴를 물었다.


 나는 아직도 처음 입사한 그 회사에 다니고 있다. 그만둔다, 그만둔다 하면서도 4년째 그렇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카페에서 보낸 점심시간이 있어서 버텨온 것 같다. 그곳은 숨통을 트는 나의 아지트 역할을 톡톡히 해줬고 다른 직업을 생각하고 준비할 수 있는 공간이 돼줬다. 그렇지만, 나는 이직에 성공하지도, 프리랜서 번역가가 되지도, 세무사가 되지도 못했다. 드라마로 치면 주인공의 4년 뒤를 기대했는데, 허무한 결말인 셈이다. 하지만, 퇴사할 생각으로 계속해서 다른 길을 준비하다 보니 ‘어차피 퇴사하고 다른 일 할 건데…’라는 마음가짐으로 회사에 다닐 수 있게 됐다. 회사와 거리 두기가 가능해졌고 불쾌한 상사를 속으로 업신여기는 것도 할 수 있게 됐다. 어차피 회사는 돈 벌려고 다니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솔직히 창업자가 아니고서야, 회사에 대한 충성심, 개인의 자아실현은 책에서나 볼 수 있는 구시대적 아이디어가 아닌가.


 자투리 시간 동안 그곳에서 품었던 막연한 희망과 현실에서 탈출하려는 시도가 역설적으로 나의 퇴사를 막았고 지금까지 꾸준히 먹고살 수 있게 해 줬다. 지금도 회사를 벗어나려는 노력은 계속하고 있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꽤 걸릴지도 모르겠다. 이젠 어느새 자리 잡은 직장인이 됐고, 막상 되고 보니 당분간은 이것도 그렇게 최악은 아닌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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