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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세윤 Apr 07. 2021

돈보다 꽃일 때가 있다

들이 쬐는 햇빛에 억지로 눈 뜬 주말 아침,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얼어 죽은 식물이었다. 몇 달 전 내가 잘 키워보라고 남자 친구에게 건네준 칼란디바다. 생을 다하고 흑갈색으로 변해 옆으로 고꾸라진 모습이 어쩐지 애잔해 보였다. 추운 겨울날 창문을 활짝 열어 두고 외출해 잘 크고 있던 놈을 죽게 만들어 그에게 화를 냈었다. 어느 글에선가 드라이플라워는 사실상 죽은 식물로, 거기서 생기는 벌레가 집안을 점령해 사람에게 해롭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생각을 하니 죽은 식물이 집에 있는 게 여간 찝찝하지 않았다. 칼란디바는 죽었지만, 화분은 멀쩡히 남아있어 다른 식물을 심으라고 한 것이 몇 주 됐다. 도무지 새로 심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를 뒤로하고 혼자 꽃집을 찾아 나섰다. 


 거리의 완연한 봄 햇살에 좀 전의 화가 조금 누그러졌다. 근처 망원 시장의 꽃집으로 향했으나, 주말이라 문을 닫았다.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리던 중, 시장의 끝 무렵에서 '민주플라워'를 발견했다. 간판은 투박했지만, 가게 밖에 진열된 식물은 푸릇푸릇하여 믿음이 갔다. 가게에 들어가 15일 주기로 물을 주면 되는 식물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이미 집에 극락조, 디시디아가 있어 물 주는 주기를 15일로 맞추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크루시아를 추천받았다.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던 그 푸른 식물 중 하나였다. 한눈에 맘에 들어 화분에 갈아 심었다.

새로 심은 반려 식물, 크루시아

 기분이 좋아져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물통에 꽂혀 있던 보라색 생화에 눈길이 갔다. 왜였을까. 전엔 생화를 직접 사는 사람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이틀에 한 번 화병의 물을 갈아주고 줄기 끝을 살짝 잘라주는 수고를 들이지만, 그 생명이 오래가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나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고 이른 죽음으로 보답하는 생화는 내겐 배신자 같았다. 게다가 다른 반려 식물에 비해 값이 더 나가는 데도 금방 죽어버리니, 돈 쓰는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꽃보단 돈이라는, 낭만을 잃어버린 사람이 나였다. 


Photo by JM Oh

 그런데 그날은 봄에 취했는지, 나를 야무지다고 칭찬하는 꽃집 아줌마의 말에 취했는지, 생화가 사고 싶었다. 화병을 파는지 묻자, 조금 큰 화병뿐이라며 보여줬다. 어지간한 가정용 물병보다 커서 부담스럽긴 했지만, 한번 마음먹은 이상 꼭 사고 싶었다. 좀 전에 본 보라색 생화, 스토크도 줄기를 조금 잘라 꽂아 달라고 했다. 보라색 스토크 하나만 사겠다고 하자, 꽃집 아줌마는 병에 비해 빈약한 꽃송이가 마음에 걸렸는지 값을 받지 않고 노란색 프리지어, 흰색 스토크, 유칼립투스도 잘라 섞어줬다. 동네 꽃집에서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한 아름다운 꽃다발이 만들어졌다. 그 화병을 끌어안고 다음에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곤 집으로 돌아갔다. 


 그 화병 하나가 주는 생기와 싱그러운 향이 집을 아늑한 공간으로 만들어줬다. 그 분위기에 취해 연신 꽃 사진을 찍었다. 전에 몰랐던 생화가 주는 기쁨이었다. 꽃 하나로 이렇게 들뜰 수 있다니. 그제야 그간 나의 노력을 과대평가했던 건 아닌지 되돌아보게 됐다. 생화는 그 짧은 생을 다해 내게 향기와 고급스러운 분위기, 마음의 안정, 이렇게 글쓰기 소재까지 제공하는데, 이틀에 한 번 물을 갈아주고 줄기를 조금 잘라주는 게 그렇게 힘드냐고 누군가 따지면 말문이 막힐 것 같다. 또 어쩌면, 생화가 필요로 하는 수고와 그들의 짧은 생이 찰나의 기쁨을 극대화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들인 수고에 비해 오래가지 못하는 생명력이 역설적으로 그 아름다움을 더 크게 느끼게 하는 것이리라. 오랫동안 멍하니 앉아 꽃병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자니 ‘그래, 가끔은 돈보다 꽃일 때가 있구나’ 싶었다. 먹고사는 게 다가 아닐 때도 있어서 그렇게들 낭만을 찾는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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