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행 비행기를 놓쳤다. 당연히 그곳인 줄 알았던 탑승구가 아니란 걸 알았을 땐 이미 너무 늦었다. 헐떡이며 원래 가야 했던 탑승구로 뛰어갔지만, 비행기는 이미 문을 닫은 후였다. 해외여행이 처음도 아니었는데 어이없는 실수였다. 공항엔 출발 시각보다 2시간 일찍 도착했었기에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몇 년 전 교환학생으로 떠난 마드리드 공항에서 일어난 일이다. 10여 일간의 부활절 휴일을 앞두고 며칠을 고민하며 여행 스케줄을 짰다. 이미 예약한 숙소, 다음 교통편, 입장권 등 머릿속에 떠오른 것만 해도 이번 여행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수십 가지였다. 무엇보다 다른 친구들은 이미 떠난 마드리드 시내에서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부여잡고 로마로 가는 다른 항공편을 검색했다. 결국 원래 예약했던 항공편보다 몇만 원 더 값을 치르고 로마로 떠날 수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로마라는 행선지만 생각하고 마음만 급했던 나머지, 새벽 도착 비행기 티켓을 산 것이다. 애매한 새벽 시간이라 공항에서 숙소가 있는 시내로 갈 버스 편이 없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닫자, 헛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그렇다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동양인 여자 혼자 택시를 타고 악명 높은 로마중앙역에 가는 건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험악한 로마의 치안에 대해선 익히 들었기 때문이다. 비행기 티켓도 새로 사는 등 계획에 없던 지출로 이미 주머니 사정도 여의치 않았다.
결국, 첫차 시간인 새벽 5시 반까지 공항 벤치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좋게 말해 기다리는 것이지, 사실상 노숙이었다. 몸에 지니고 있는 현금을 누가 빼앗아 갈까 불안했고, 나 자신의 안위도 걱정돼서 뜬 눈으로 꼿꼿이 앉아 핸드폰의 작은 화면만 들여다봤다. 그렇게 몇 시간 흘렀을까. 적막한 공항엔 시끄러운 청소기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공항 청소 시간이구나. 공항 직원들은 나 같은 (공항에서 노숙하는) 사람은 으레 보는 양 개의치 않는 듯했다. 나 혼자 좌불안석, 부끄러워하며 새벽 시간을 공항에서 견뎌내고 첫차를 탔다. 밤은 꼴딱 지새웠지만, 미리 세워 둔 일정대로 움직이려면 쉴 수 없었다. 허름한 숙소에 짐만 던져두고 몽롱한 정신으로 먼저 콜로세움 역으로 향했다.
뻑뻑한 눈을 비비며 본 콜로세움은 지난 새벽의 고통을 치유해 주는 듯했다. '영화에서 본 적이 있던가, 아님 책이었나, 거기서 봤을 때보다 훨씬 크네, 내가 진짜 로마에 왔구나.' 멍하니 서서 무의식 저편의 기억을 찾는 것처럼 두서없이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남부 유럽을 여행하며 가장 좋았던 게 뭐냐고 물으면, 높고 청량한 하늘과 내리쬐는 밝은 햇빛, 따뜻한 날씨라고 답하곤 한다. 큰 콜로세움을 내리 덮은 햇살과 주변의 푸른 경관, 적당히 따뜻한 날씨, 관광객들의 들뜬 분위기가 아직도 사진처럼 머릿속에 박혀 있다.
콜로세움의 웅장함과 로마 구시가지에서의 여유로운 산책은 지금도 나를 지탱해주는 한 부분이 돼 주고 있다. 상사의 갈굼에도 나의 자존감이 무너지지 않는 건 '콜로세움 경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아, 고되다' 싶으면 언제든지 꺼내 보면서 미소 짓고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경험이 내겐 있는 것이다. 한여름 그라나다 동굴에서의 플라멩코, 비 오는 밤의 런던 뮤지컬, 처음 만난 여자들과 함께 본 산토리니의 주황빛 석양 같은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