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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코치 Apr 06. 2017

16. 코칭육아

아이의 선택권, 그리고 책임의식

# 킥보드 


아이가 어린이집 등원을 킥보드로 하겠다고 했다.

어린이집까진 2킬로가 넘고 언덕길이 두세 차례 있다.

준비가 안된 아이에게 덜컥 기회를 줬다간

킥보드는 왼손에, 아이는 오른손에 잡아끌며 

어린이집까지 종종걸음 칠 게 불 보듯 뻔했다. 

“킥보드를 타고 가려면 먼저 연습이 필요해.

오늘 중간까지 걸어가고, 

내일 어린이집까지 걸어가는 데 성공하면 

그다음 날 킥보드 타고 가게 해줄게” 

아이는 ‘걸어가는 연습’ 없이도 자기는 킥보드로 해낼 수 있다고 우겼지만,

나 또한 뻔히 보이는 고생길을 자처할 수 없었다.

아이는 그래서 이틀간 내가 제시한 목표를 달성해냈다. 

그다음 날, 아이에게 킥보드를 맡겼다.

역시나 걷는 것보다 킥보드 타는 건 더 힘이 드나 보다.

절반쯤 오더니 아이는

“엄마 저 못하겠어요”라고 자백한다.

“음.. 네가 할 수 있다고 해서 킥보드 가지고 온 거야. 끝까지 해보자” 


낑낑 낑낑 


2/3쯤 와서 아이는 포기 선언.

“엄마 도와주세요.”

“다음엔 연습 더 많이 하고 오도록 하자.”  

그 뒤로 아이는 평지에서 킥보드 연습을 열심히 하고 있다. 


# 간식 


우리 집에서 시판 과자는 주말에만 1회 먹는 것이 원칙이다.

이 원칙이 시작된 것은 4세.

어린이집에서 시판 간식에 노출되니,

마냥 막을 수가 없어서 주말 1회를 허용했다.

2년 가까이 되었지만,

아직도 어린아이가 그 원칙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아이는 늘 협상을 시도한다.

그러니 엄마로선 가끔은 융통성을 발휘할 필요가 생기는데,

그렇다고 원칙을 무너뜨리는 융통성은 곤란하다.

그래서 우리 집 협상은 이런 식이다.

“엄마 저도 새콤 달* 먹고 싶어요”

“그건 주말 간식이고, 오늘은 화요일인데?”

“그래도 먹고 싶어요.”

“그럼 이번 주말엔 주말 간식 없다. 알겠지?”

“네, 엄마!” 

며칠 전, 어린이집 앞에서 뛰어노는데,

친구가 껌을 나눠 준다.

껌은 집에서 볼 수 없는 간식이지만,

누가 주는 간식은 종류를 제한하지 않고 감사히 받게 한다.

다만 시간은 체크한다. 

“라미야 지금은 간식 먹는 시간 아닌데?”

“아이~ 먹고 싶어. 친구들 다 먹잖아.”

“오케이, 그럼 저녁 먹고 간식 없다. 알지?”

“과일 간식도 안돼?”

“아니 그건 돼.”

“네 엄마!”

(물론 이렇게 명쾌하게 정리 안 되는 경우도 많음) 


<초콜렛을 쪽쪽 아껴먹는 4살 아이>

  


# 물고기 


옆집에서 분양해준 구피 두 마리.

일주일에 한 번씩 물 갈아주는 건 같이 하는데

아침저녁 밥 챙겨주는 건 아이 몫이다.

아이는 처음 2~3일은 신나서 밥을 주더니

그 뒤 며칠간은 기억에서 지운 듯 밥 주기를 잊었다.

아이에게 예고했다.

“앞으로 3일간 네가 스스로 밥을 챙겨주지 않으면,

우리 집에서 물고기를 키울 수가 없어”

“엄마가 줘. 나 힘들단 말이야”

“이 물고기는 네가 원해서 키우는 거잖아.

밥은 네 몫이야. 밥 주기를 할 수 없다면

엄만 이 물고기 다른 사람 줄 거야”

“엄마도 물고기 좋잖아! 그러니까 엄마가 해!”

“네가 밥 못 준다면 옆집 언니한테 바로 돌려줄게.”

“알았어. 내가 할게.” 


물고기를 보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아이는

물고기 밥 주기를 신경 써서 챙겼다.

물론 가끔 까먹을 때는 “아가들 밥 줬니”라고 물어봐 주곤 한다.

그럼 말없이 가서 밥을 주고는 “네”하고 답한다.

녀석에게도 자존심이 있다. 


# 선택과 책임 


나는 직업적으로 코칭을 하지만,

코칭은 나에게 직업만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삶과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기도 하고,

내 삶과 관계에서 변화와 성장을 위해 적용하는 기술이기도 하다. 


코치라는 정체성을 가진 채로 엄마가 된 나는

자연히 코칭적으로 육아를 하게 되었고,

('코칭적'이라는 표현이 아리송하긴 하지만, 나도 여전히 찾아가는 중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아이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의식을 갖도록 돕고자 한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신생아였을 때부터 작은 선택권들을 주곤 했다.

딸랑이와 숟가락을 들고 “뭐 가지고 놀고 싶어”라고 묻는 식이다.

아이는 예외 없이, 갈등 없이, 지체 없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찾아냈다.


좀 더 커서는,

자기 선택에 따라 얻는 것과 잃는 것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려줬다. 

앞으로 20년 후, 아이가 성인이 된 미래는,

지금의 의식으로는 결코 예측할 수 없는 모습이 펼쳐질 것이다.

불과 10년 전, 스마트폰의 대중화와 AI의 등장을

평범한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것처럼.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아이를 준비시킨다는 것은,

코딩을 가르치고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아이가 변화의 파도를 스스로 헤쳐나갈 

주인의식을 갖도록 하는 것.

바깥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반응은 나의 선택이고, 그 선택이 다른 결과를 만든다는 것을

아이가 알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이에게 작은 선택권을 준다.

그리고 그 결과에 책임지게 한다.

그것이 지루하고 귀찮은 끝도 없는 대화를 동반해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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