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내 편이 아니라면 누가 내 편이 될까?
우리 부부는 출산 전까지는 싸움을 해본 적이 없었다. 싸워야 좋은 거라는 선배 부부들의 조언을 들을 정도였다. 잘 맞고 잘 사는데 굳이 싸워야 하냐며 웃어넘겼다. 헌데, 아이가 생기니 부부 사이가 달라졌다! 육아 초기에는, 육아가 서투른 남편에 대한 답답함이 컸고, 후반부에는 (내 기준에 턱없이 모자라는데도) ‘이 정도면 좋은 아빠’라고 자부하는 남편이 얄미웠다. 쉼을 위한 나의 배려에도, 늘 ‘피곤하다’, ‘쉬고 싶다’를 달고 사는 남편이 서운하고 미웠다. 대화법을 배우고 가르쳐온 나지만, 남편과의 관계에선 이론보다 감정이 앞서 나갈 때가 종종 있었고, 오해가 쌓였지만 풀 기회가 없었다.
그중 특히나 나의 뇌관을 번번이 건드리는 것은 남편이 핸드폰에 코를 박고 있는 순간이다. 아이가 ‘아빠는 나보다 핸드폰을 좋아해’라고 생각할까 봐 걱정되었고, 아빠따라 핸드폰에 빠질 것도 걱정되었다. 그 날 아침도 그랬다. 여러 번의 부탁에도 그는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사방과 차단된 듯 보였다. 전날 밤에도 늦게 들어온 그였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결국 화의 에너지가 가득 실린 말이 나가고 말았다. “핸드폰 좀 그만 보라고!” 그는 되받아 쳤다. “내가 노는 줄 알아? 회사일 하는 거야. 결재해야 되는데 어떡해!”
당당한 그의 반응에 나는 더 울화가 치밀었다. ‘일은 당신 혼자 해? 가족을 위해 그 정도 시간도 못 내는 일이라면, 그냥 때려치워’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나는 독박 육아에, 남편은 장시간 근로에,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인가? 핸드폰 안 보기, 그깟 부탁 하나 못 들어주나? 나도 밖에 나가서 돈 벌어 올 수 있다고! 나도 배울 만큼 배웠고, 당신만큼 능력 있다고! 당신이 집안일의 고단함을 알아? 내가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 알기나 하냐고!
그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남편에 대한 원망감과 서운함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당신은 그래도 회사에서 대화 나눌 사람이라도 있지, 시간 맞춰 밥이라도 먹을 수 있지, 난 외롭고, 삼시 세 끼도 못 챙겨 먹는단 말이야!’ 관계, 일, 취미, 나만의 시간 등등 아이를 키우면서 잃은 모든 것에 대한 억울함이 떠올랐다. 아무리 노력해도 힘든 대한민국의 육아현실이 암담했다. 나는 꺼이꺼이 울었다. “우리한텐 당신이 필요해. 밤에도 못 보는데, 아침에라도 우리랑 온전히 있어주면 안 돼?”
그는 놀랐다. 입을 다물고 들었다. 징징대는 법이 없고, 우는 일은 더욱 없는 아내의 울음 섞인 외침에 그는 할 말을 잃었다. “애가 자기를 얼마나 찾는 줄 알아? 우리도 대화도 많이 못하고.. 그래서 얼마나 속상한 줄 알아?” 그는 한참을 듣더니 내가 그토록 힘든 줄 몰랐다고 했다. 몰라줘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곤 자기도 힘들다고 고백했다. “회사에서는 쫓기지, 집에 오면 자기 눈치 보느라 맘 편히 쉬지도 못하지, 나도 많이 힘들어.” 한층 낮아진 톤으로 자신의 힘듦을 솔직하게 전하는 그에게 나는 더 이상 화가 나지 않았다.
그는 조금 달라졌다. 그것은 부가적인 소득이었다. 그것과 관계없이 나는 내 속을 시원하게 표출한 것이 너무나 홀가분했다. 자존심 상해서, 혹은 말해봤자 변하진 않고 관계만 더 나빠진다고 속으로 삭였던 말들이 얼마나 많던가. 속마음을 투명하게 나누는 것, 그것이야말로 부부 사이에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부부란 아웅다웅 다퉈도 결국은 가장 오래, 가장 깊은 마음을 터놓는 사이이니 말이다.
남편은 적이 아니고, 나는 피해자가 아니다. 둘 다 바쁘고 경쟁적인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있는 인생의 주인공들이다. 부부는 함께 인생을 꾸려 나가기로 스스로 선택했고, 그러기에 삶 속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고통에 공동의 책임이 있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으로는 결코 갈등을 해결할 수없다. ‘너 때문에’라는 태도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교과서적인 말처럼 들리지만, 서로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소통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시도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
왜 내 어려움을 몰라주나? 왜 알아서 못 챙겨주나? 왜 저렇게 힘들어하나?라고 핏대 세울 때는 보지 못했던 진실이 있었다. 바로 그도 나처럼 체력이 달린다는 것. 그도 나처럼 지치고 힘들다는 것. 그럼에도 자기에게 주어진 ‘아빠’라는 새로운 역할을 수행해 내기 위해 자기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 ‘아빠니까, 남편이니까이 정도는 당연하지’라는 내 머릿속 이상을 집어치우고 그를 있는 그대로 관찰해 보니, 그도 나처럼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번아웃 된 그에게 내 고충을 받아줄 여유가 없는 게 당연했다.
나는 마음에서 우러나와 그의 쉼을 배려하기 시작했다. 주말에 한 나절이라도 남편이 쉬도록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토요일 밤이면 온 가족이 볼 수 있는 영화 한 편을 골라 느긋하게 즐겼다. 친한 엄마들과 아이 동반으로 1박 2일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평일에 간혹 일찍 들어오는 날이면, 집안일은 잠시 밀쳐두고 느슨한 모드로 바꿨다.
동시에 나는 남편에게 아이를 전적으로 맡기는 기회를 늘렸다. 남편이 미덥지 않고 실수할까 봐 불안해서 내가 도맡아 했더니 그는 그대로 내 어려움을 이해할 기회가 없었고 부성을 키워나갈 기회가 없었다. 그에게도 실수하고 배워나갈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처음엔 한 시간, 다음엔 세 시간, 그렇게 육아와 살림을 책임지는 기회를 늘려갔더니 네 살 어느 날엔가는 2박 3일간 멀리 시댁에 아이와 가서 지내고 오기도 했다. 누군가의 밥을 차리는 의무로부터 해방된 그 3일은 나를 한껏 충전시켜 주었다.
그렇게 각자의 휴식을 배려할 수 있었던 데는 ‘투명한 대화’가 큰 도움이 되었다. 아이가 생기고 너무나 바빠지면서 줄어들었던 둘만의 대화. 이제는 그 대화의 가치를 안다. 그래서 틈틈이 사소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눈다. 대화중에 시도 때도 없이 끼어들던 아이도 이젠 “엄마 아빠 대화중이야. 잠깐만 기다려줘”하면 입 다물고 기다린다. 때로는 막걸리나 와인 한 병 놓고 속마음 나눌 수 있는 분위기를 잡는다. 뭐가 힘들고 뭐가 좋은지, 뭐가 필요한지를 열린 마음으로 나눈다. 의견차가 있고 때론 갈등이 생기기도 하지만 괜찮다. 갈등을 풀고 나면 더 단단한 관계가 되니깐. 자존심 세우다간 등을 돌리게 되고, 결국 좁힐 수 없는 마음의 거리가 생기는 것보다 훨씬 좋은 것 아닐까?
by 지혜코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