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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날다 Mar 12. 2017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코르도바·세비야·그라나

스페인은 흥미로운 나라다. 마치 세상 풍파 다 겪고 지랄 같은 부침 다 견뎌낸, 사연 많은 중년 여성의 모습이랄까! 이야기꺼리가 넘쳐 수다스럽고 정이 많아 누구든 품어 안을 수 있는 넉넉함을 가진 사람, 그녀의 얼굴에서 한 때 대항해시대를 주름잡았던 제국주의의 냉정함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다양한 문화를 품을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도시의 풍경과 세상에서 가장 낙천적인 사람들의 표정을 만들어낸 것이리라.        

스페인(‘스페인 지역’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 같긴 하지만)은 유럽 다른 나라와 달리 봉건제도를 확립하기 전 이슬람의 침략을 받는다. 이후 8백 년 동안 스페인은 이슬람의 땅이었다. 그 첫 번째 수도였던 코르도바는 711년부터 1236년까지 세계 최대의 도시로 번성했다. 당시 주택의 수가 20만호, 도서관 장서가 60만권에 이를 정도로 문화, 기술적 수준이 상당했다고 한다. 그 성취를 엿볼 수 있는 곳이 메스키타 사원이다. 메스키타(‘모스크’를 뜻하는 스페인 말), 이슬람 사원과 카톨릭성당이 한 건물에 공존하고 있는 세계유일의 사원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평가받고 있다.          

공존! 하지만 메스키타를 직접 본 이들이라면 이 말에 기껍게 동의하기는 힘들다. 역사는 이긴 자들의 편이라고 했던가? 한 가운데 카톨릭의 종탑을 이고 선 모스크는 가슴에 칼을 꽂고 있는 듯 아픔이 느껴졌다. 게다가 출입구마저 흙벽으로 막아버려 사원은 더 이상 누군가를 향해 평화와 안식의 문을 열 수 없다. 뺏고 뺏기는 전쟁의 역사, 그 결과 카톨릭 성당을 꾸미는 한낱 장식품이 돼버린 거대한 메스키타는 나와 다른 이들과 공존하지 못하는 오늘날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 되고 있다.   

메스키타 바깥, 유대인 거리의 풍경이 답답한 마음을 풀어준다. 남부 스페인의 태양을 닮으려는 듯 화사하게 눈부신 하얀 벽돌집들, 작고 아담해서 동화 속 소인국에 온 듯하다. 어느 한 집 예외 없이 벽마다 담쟁이 꽃을 키우고 꽃 봉우리를 담은 화분을 내걸어 지나가는 모든 이들에게 활짝 인사를 건넨다.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골목길은 금세라도 말라깽이 중세 아이들이 툭 튀어나올 것 같고 낮은 담벼락 너머 작은 파티오(정원)에서는 지금도 천 년 전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사랑하고 있을 것 같다. 가꾸고 매만지며 소중하게 이어온 일상의 삶이 천년의 시간을 무색하게 만드는 곳, 바로 코르도바다.                 


세비야, ‘시장이 열리는 곳’이라는 뜻. 로마식민지 시대에는 조공이 드나드는 길이었고 이슬람 왕조 시대에는 두 번째 수도였으며 대항해 시대에는 신대륙으로부터 금은보화가 들어왔던 황금의 도시였다. 이런 지정학적 중요성 덕분에 세비야는 오랫동안 문화, 예술, 금융의 중심지였다. 

역사를 자랑하는 여느 다른 유럽 도시들과 달리 세비야의 거리는 넓고 여유롭다. 마치 최근의 도시계획에 따라 잘 정비된 신도시 같은 분위기다. 거리를 달리는 트램 역시 어디서도 보지 못한 최신식이다. 하지만 그 거리에는 말이 끄는 옛날식 마차 또한 오고간다. 세비야의 거리에서는 과거와 현재, 서로 다른 시간이 교차하고 있다.  

    

세비야 거리에서 만난 스페인의 평범한 중년 여성들. 그녀들은 한 목소리로 노래했고 몇몇은 능숙하게 플라멩코까지 췄다. 다른 도시에서 거리의 악사들이 펼치는 공연을 본적은 있지만 이렇게 평범한 이들이 거리에서 즐기는 모습을 본 것은 처음. 이것이 바로 스페인의 정서가 아닐지,     

  

    

이사벨라 여왕으로부터 약속받은 대우를 받지 못했던 콜롬부스는 스페인 땅에 다시는 발을 내리지 않겠다고 했다. 그의 말은 유언이 되어 이렇게 지상 위 공중에 떠 있는 무덤으로 남았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세비야 대성당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스페인에는 도시마다 스페인광장이 있다고 한다. 그 중 가장 크고 화려한 곳이 세비야에 있는 스페인 광장이다.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 2 클론의 습격>에 등장하기도 했고 배우 김태희가 출연해 플라멩고를 췄던 휴대폰 광고의 배경이기도 했다. 원형의 광장, 그 벽에는 스페인 각 도시를 상징하는 타일화가 이어져 있다. 이곳에서 모든 스페인을 만날 수 있는 셈이다.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했던 8백년 이슬람 왕조의 마지막 수도, 그라나다. 험준한 산악지역인 시에라 네바다 산맥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라나다는 그 이름보다 알함브라로 더 유명하다. 이슬람 마지막 왕은 카톨릭 세력에 밀려 이베리아 반도를 떠나면서 “그라나다를 잃는 것은 아깝지 않으나 알함브라를 보지 못하는 것이 슬프다”고 했다. 그토록 사랑했던 알함브라를 지키기 위해 저항을 포기하고 스스로 떠난 것이다. 하지만 알함브라는 훗날 같은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 나폴레옹에 의해 되돌릴 수 없는 파괴의 아픔을 겪었다.        

알함브라는 붉은 성이라는 뜻이다. 온통 붉은 색 무미건조한 흙벽, 철저한 가림막, 위장이다. 밖에서 보면 전쟁에 대비한 천혜의 요새지만 숨겨진 내부는 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든 세상에 없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알함브라는 소리와 향기로 방문객들을 맞는다. 어디서나, 흐르는 물소리를 들을 수 있고 달콤한 오렌지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알함브라는 화려한 치장을 과시하는 평범한 궁전이 아니다. 마음을 붙잡는 신비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특히 나사르 궁전의 아라베스크는 별을 보고 먼 미래를 꿈꾸었던 이슬람 사람들의 아득한 마음이 보이는 듯 알 수 없는 슬픔이 느껴진다.  사라진 왕조, 그들이 꿈꾸었던 미래는 무엇이었을까?      

공간의 이동으로부터 자유를 얻고자 했던 애초 나의 시도는 스페인에서 시간의 미궁 속에 갇혀 버렸다. 천 년의 시간을 무색하게 만든 코르도바에서, 서로 다른 시간이 공존하는 도시 세비야에서, 사라진 왕조의 꿈을 간직한 붉은 성의 도시 그라나다에서......

어디에 있건 무엇을 보건 누구를 만나건, 무한한 시간이 전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한다면 삶은 그저 제자리걸음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여행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나서는 길이며 그것이 삶의 본원적 의무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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