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남자 친구 생겼어요!”
딸의 조그만 입 매무새가 어찌할 바를 모른다. 배실배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뾰로통 삐죽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뭐지? 뭔가 좋은 소식을 전하려나?’ 마음속 기대가 고개를 들락 말락, 하지만 일도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한 척한다. 혹 아이가 기대와 다른 이야기를 한다면 내 얼굴에 실망하는 기색이 비칠 텐데, 단 일초라도 아이에게 그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재빠르게 숨을 고르고 마음을 단단히 동여맨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왜-애?”하고 묻는다.
“엄마! 나--- 남자 친구 생—겼어요.”
힘차고 당당하게 시작했지만 결국 마지막 소리는 잦아들었다. 환청인 냥, 못 들은 척하고 싶은데……그럴 순 없겠지! 고2, 관심 없는 척하면 섭섭해하고 잔소리라도 할라치면 주체성을 침범한다며 까탈을 부리는 예민한 나이, 그 딸이 남자 친구가 생겼다고 선언한다. 마냥 어린아이는 아니라는, 그래서 존중받고 싶다는 것 더불어 내 변화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어리광(?)까지. 내, 참! 속이 터진다. 터져!
그랬구나. 딸은 요사이 유난히 질문이 많았다. ‘남자아이들이 나한테는 관심이 없나 봐요’ 시큰둥했다가 ‘첫 키스는 언제 했어요?’ 호들갑을 떨며 겁도 없이 엄마에게 고백을 채근해 댔다. 그때마다, 되도록 남자 보기를 돌같이 하라며 은근슬쩍 세상 남자들에 대한 디스를 날렸다. 그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배신을……
기습적인 공격에 어지럽기 시작했던 머리가 다소 진정되자 구멍 난 것처럼 가슴 한가운데가 서늘해졌다. 남편의 얼굴이 떠오른 것이다. 유난히 표 내지는 않지만 마음에 묻어둔 정은 유별난 ‘샤이 딸 바보’. 그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그 마음이 오죽 서늘할까! 하필 화사하게 꽃 피는 따뜻한 봄날에 말이다, 잔인하구나~
솔직히 고2 씩이나 된 딸에게 남자 친구가 생긴 것이 호들갑 떨 일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부모에게 물어보고 싶은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당신들은 괜찮았냐고?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냐고?”
왜 이상한지, 왜 섭섭한지, 현재로서는 원인을 찾는 일이 어렵고 무의미하다. 아직은 경험이 얕아 어려운 것이고 원인을 찾았다고 해도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에 무의미한 것이다.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징징거림은 여기까지.
나와 남편을 포함해 세상의 모든 어른들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며, 무한경쟁 속으로 아이들의 등을 매정하게 떠밀고 있다. 우정도, 나눔도, 사랑도 잊고 살라며……. 하지만 아이들은 수십 층 콘크리트 건물이 짓누르는 것 같은 숨 막힘 속에서도 눈을 맞추고 귀를 기울이며 손을 맞잡는다. 아무리 퀭한 입시지옥 한가운데 있지만 ‘여릿여릿’ 가장 순수한 인생의 한 때를 어둡게만 채색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딸아, 다행이구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오로지 너의 얼굴에 눈빛을 맞추고 너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는 특별한 친구가 생겨서 말이다. "
P.S> 18년 전, 신부 입장하는 나의 손을 잡고 눈물 흘리시던 아버지의 얼굴이 생각 나, 코끝이 찡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