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리날다 Jan 08. 2024

언어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삶으로 대신 말할 수밖에

최진영 작가 < 단 한 사람>

아마도 예닐곱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새벽에 일하러 나간 아버지가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불안했다. 아버지를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콩닥콩닥 가슴이 뛰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매번 아버지는 코가 찡해지는 차가운 밤공기를 가득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왜, 어째서 어린아이가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막연하게 죽음은 곧 존재의 부재라는 것을 예감했던 듯하다.      


결혼하고 1년쯤, 무심결에 남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적지 않게 했다. 이제 곧 저녁이면 다시 만날 사람인데 더 이상 서로를 바라보지 못하는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며, 몰래 눈시울을 붉혔다. 기우도 그런 기우가 없었지만 내 것인데도 내 것이 아닌 듯 생각은 죽음까지 내달리는 일이 잦았다. 그리고 매 순간이 마지막인 듯 내 사랑은 안쓰럽게 더 지극해졌던 것 같다.      


최진영 작가의 <단 한 사람>은 죽어가는 무수한 사람들 중에서 단 한 사람만을 살릴 수밖에 없는 이들, 단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수많은 죽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삶과 죽음이 나눌 수 없는 것이라 말한다. 삶도 어쩌면 뿌리째 뽑히는 것일 수 있고 죽어서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사라진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남김없이 슬퍼하고 마음껏 그리워하듯 죽음을 대하고 삶도 남김없이 누리고 후회 없이 사랑해야 한다고 위로한다. 삶과 죽음은 나눌 수 없기에.      


“상실 앞에서 슬픔은 마땅했다. 그것을 너무 오랫동안 미뤄왔다. 그래서 금화가 찾아왔는지도 모른다. 이제 마땅한 슬픔으로 나를 기억해 줘. 기약 없는 희망으로 나를 외롭게 두지 마. 죽음은 사라짐. 말도 안 되는 죽음은, 느닷없는 죽음은, 쓰러진 나무에 깔린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많다.”     


비단 소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너무 많은 허무맹랑한 죽음을 목도해 왔다. 죽음은 또 다른 죽음의 갱신으로 그 끝을 도저히 알 수 없고 우리는 결코 애도에 도달하지 못한다. 허탈, 분노, 상실, 부채감 그 사이 어딘가를 헤매며 다만 서성일뿐이다. 언어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말해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릴 것이기에 우리는 그저, 삶으로 죽음을 대신 말하고 있을 뿐이다.


나 또한 언젠가 사라져 버릴 ‘단 한 사람’이기에.

매거진의 이전글 '오래된 미래'는 우리의 '현재'가 될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