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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종목 Jan 26. 2024

Why me? No, I did it!

생각의 전환, 해석을 통해 승리하는 삶으로.

장모님이 큰 사고를 당하셨다. 

소아마비로 태어나 걸음조차 걷기 힘든 채로 살아오셨다. 잇따른 부상이 있을 수밖에 없는 모진 삶이었다. 결국 목 신경이 크게 손상되어 큰 수술까지 받으셨지만 큰 호전은 없었다. 게다가 또 큰 부상을 겪어서 최근에는 종일 찾아오는 통증 때문에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괴롭다 말씀하실 정도였다. 어떠한 의료적 방법을 동원한다 해도 회복이 안 될 수준이라는 것이 더 큰 절망이었다.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한 시술을 받기로 한 바로 그날, 하필이면 넘어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전혀 몸을 지탱하지 못한 채 넘어지다 보니 골반 뼈가 완전히 부러져서 어긋나 버리고 혈관이 파열되는 큰 부상을 당하셨다. 그게 당장 어제 아침의 일이었다. 응급실을 거쳐 오늘 아침 수술이 이뤄졌다. 


평생 불운과 함께 하셨다. 출생 시 의료 사고로 인한 소아마비, 영리했지만 신체의 제약으로 학업 중단, 군에서 당한 큰 사고로 전신 불구까지 갔던 장인어른과의 결혼, 그 후 시댁의 모진 구박과 무시, 헌신적 치료로 거동을 많이 회복한 남편의 주폭, 잇따른 부상으로 인한 건강악화 등…


수많은 한이 서릴 수밖에 없던 장모님의 삶은 여전히 고통 속에 있다. 특히 끊이지 않는 통증이 가장 괴롭다. 잠시라도 통증을 멎게 할 시술조차 받지 못한 채, 하필 그날 아침 더 큰 부상을 입은 아이러니는 가뜩이나 지친 그녀의 영혼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한스럽고 원통하고, 절망스럽고 분노가 치미는 장모님의 불운들. 장모님의 언니, 아내의 이모분들은 사고 이전에도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한다. ‘우리 동생 딱하고 불쌍해서 어쩌나… 왜 이리 불행한 일들이 몰아서 생기나. 불행하다 불행해!’ 


나 또한 장모님의 불운이, 고통이 안타깝다. 하지만 불쌍하거나 불행한 삶이라고 치부하고 싶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장모님의 삶은 날 때부터 가진 신체의 제약과 잇따른 불운을 정면으로 이겨낸 

인간승리의 위대한 표본이기 때문이다. 


거동조차 불편한 몸으로 심신이 무너져 있던 남편을 다시 살렸고, 자신을 무시하고 구박하던 치매 걸린 시어머니를 오래도록 정성스레 모셨다. 딸 셋을 어려운 조건에서도 건강하고 바르게 키워내어 좋은 사위들과 손주까지 보았다. 

절약과 관리, 공부와 노력을 통해 누구에게 손 벌리지 않아도 충분히 살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안정을 이뤄내었다. 자신이 받은 모멸과 무시를 결코 타인에게 전가하지 않았다. 되려 주변에 늘 예의와 경우가 바른 사람, 웃음과 배려가 많은 사람으로 살았다.


저주받은, 불운한 삶으로만 치부되어선 안 될, 위대한 인생이다.

절망적일 정도로 불리한 조건을 불굴의 의지로 이겨낸, 극복과 승리의 삶이다.


불운에 의해 절망과 분노, 원통함이 온 영혼을 휘감으려 할 때, 스스로를 지켜내어야 한다. 삶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신이 주신 위대한 과업을 완수해 내었다는 뿌듯함으로, 고난도의 시나리오를 잘 소화해 내었다는 자신에 대한 기특함으로. 그런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유일한 해답인 것을.


삶에서 모든 노력이 소용없는 영역, 절망적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은 단 한 가지다. 

생각을 전환해야 한다. 삶이라는 것은 결국 어떠한 틀로 바라보느냐에 달렸다. 

고통받고 고생한 삶으로 볼 것인지, 극복과 승리의 삶으로 볼 것인지. 


같지만 다르다. 


장모님은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Why Me!’라는 한탄과 원망이 아니라

‘내게 온 이 시련들을 나는 다 이겨냈어! I Did It!’이라는 벅찬 자부심이 어울리는 분이다. 

장모님의 몸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며, 마음의 평안을 위해 글을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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