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 처음 화실에 왔던 이유는 마음속에 있는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불쾌하고 질퍽하다가 울컥하고 날이 서는 무엇인가를 표현해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최근에는, 어떤 광경과 풍경을 보았을때 마음에 이는 심상도 그 중 하나임을 깨달았다.
그림을 보는 사람이 나와 같은 심상을 느낀다면 그것도 표현의 성공이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 벤치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이들의 뒷모습
- 고즈넉하게 지나가는 밤의 버스와 헤드라이트
- 일요일, 금요일과 다르게 발걸음이 무거운 사람들
- 섹소폰을 부르고 있는 재증공연장의 사람
같은 광경이어도 다른 분위기를 우리는 느끼고 있을 것이다.
무엇이 분위기를 자아낼까?
"똑같이 그리면 되세요."
강사분의 답변이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다.
실제와 같은 모습을 그려놓으면 나는 같은 것을 느낀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심상이 있고 장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장면이 있고 심상이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실제와 같은 모습이란 장면 전체가 아닌 어떤 특징에 대한 나의 인식이다.
사진처럼 똑같이 그리는 것, 특징만을 거칠게 그어두는 것 모두 실제와 같은 인상을 만들어낸다.
내가 연습하고 싶은 것은 후자다. 몇번 되지 않는 거친 붓터치여도 그 장면을 잡아내는 것
똑같이 그리되 인식이 되는 포인트만 그리는 것. 그림 중에는 이러한 분위기를 담아낸 그림들이 있다.
어떤 표현력을 연습해야 할지 강사분과 이야기를 나눴다. 강사분은 반가운 표정으로 자신 있게 본인이 알려줄 수 있다고 답했다.
"그냥 계속 그리시면 됩니다."
"그래도 이러한 표현법에 맞춘 연습과정들이 있을 것 같은데요. "
"아유, 그런 것 없어요. 계속 그리시면 됩니다. 그렇게 그리다보면 어느 순간 자기만의 표현이 나오실거예요."
이렇게 내 질문은 간단한 답으로 귀결되었다. 순간의 인상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똑같이 그리면 되고, 똑같은 본질만을 남기는 표현을 위해서는 그냥 그리면 된다.
지난 글에서 섬세하게 완성해 가야하는 소묘를 그리며, 섬세한 마무리에 약한 나의 일하는 방식을 반추했었다. 나는 방향성과 밑그림에는 빠른 편이다. 맥락을 짚고 빠르게 이상적인 목표를 구체화한다. 하지만 늘 결과는 평범하다. 목표만 적당히 맞춘 수준에서 허겁지겁 마치고는 한다. 퍼즐은 설계했으나 빠르게 퍼즐을 잘라내고 조각끼리 맞추는데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시간을 소비한다. 최근에도 계획하던 회사 일이 마음처럼 되지 않아 급한 마음이었다.
오랫동안 적합한 방법론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충분히 많은 업무 관련 정보와 문서들, 빠르게 문제를 풀어가며 결과물을 엮어내는 동료들, 일잘러가 되는 방법으로 소개되는 많은 책과 동영상 속에서 비법을 찾아내고자 했다. 하지만 회사생활을 하며 알게 된 것은 더 자주 더 많이 시행착오를 겪는 방법 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자주 인용 되는 '그냥 해라.' 의 뜻을 여러차례 되새겼었다.
원하는 일의 결과를 어떻게 만들어 낼까?
결과를 빚어낼 일을 하면 된다.
완성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무엇을 연습해야 할까?
그냥 하면 된다.
하지만 어떻게 계속 해낼 수 있을까? 여기서 생각을 멈추자.
그냥 하면 된다, 다만 어제와 조금 다르게.
3주 간 수업이 없는 주말에 화실을 찾아 그냥 그렸다. 그림 속 창문과 사람은 여러차례 크기와 위치가 바뀌었지만 그 사이 창문의 손잡이를 간단한 표현만으로 사진 속 손잡이처럼 보이도록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모처럼 기쁜 마음으로 일요일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