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디자인 사이에서
수많은 공예가들은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합리적 제품생산과, 본인만이 가지는 예술적 정체성 사이에서 고질적인 딜레마를 가진다. 우리는 ‘공예품’을 구매할 때 작가의 손길로 직접 빚어지는 과정을 기대하지만, 대중이 향유할 수 있는 모든 제품들이 작가의 손을 거치는 것은 물리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소비자는 작가의 손길이 느껴지는 물건, 즉 기계로 똑같이 찍어내지 않은 물건을 구매 함으로써 아티스트의 시간과 노력을 소유하고 싶은 것이다. 엔조마리는 이 부분을 고민하면서 작가의 '최소동작'에 집중했다. 그 가 남긴 수많은 디자인들은 결과물의 심미적 특성보다는 그 물건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200년 넘는 수공예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세라믹 공방 KPM은 점점 기계화되는 도자기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1993년, 이태리 디자이너 엔조마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여기서 탄생한 여러 가지 컬랙션들은 우리에게 장인정신에 관한 힌트를 던져준다.
엔조마리는 베를린의 제조소의 전통적인 도자기 제작 기술을 현대적인 미학과 결합하기 위한 협업을 진행했는데, 그가 디자인한 작품들은 단순히 수공예의 정신이 깃든 옛 작품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KPM 아뜰리에 작가들의 장인정신을 현대의 대량생산 환경에 맞게 재구성하는 일이었다.
깨진 파이프를 연상시키는 화병은 원통형으로 대량 캐스팅된 세라믹을 망피치로 내리쳐서 생기는 우연한 형태를 오브제의 디자인으로 승화시켰다.
꽃무늬 화병은 현대적인 형태를 기반으로 작가가 일일이 스탬핑 할 수 있는 프로세스를 개발하여, 도장 잉크의 농도와 장인의 제스처에 따라서 미세하게 달라지는 프린팅을 유도했다. 이 밖에도 엔조마리가 시도했던 다양한 프로젝트는 ‘수공예의 현대화’라는 의미에서 많은 영감을 던져준다.
장인정신이 깃든 오브제는 시각적으로 얼마나 작가의 참여도를 보여주는 지도 중요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오브제의 외형적 모습은 장인정신이 표출되는 하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KPM이라는 포셀린 브랜드가 오랜 시간 쌓아온 명성과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엔조마리의 화병 프로젝트는 좋은 디자인이 될 수 있었다. 그가 만들어낸 새로운 컬랙션은 단순히 새로운 형태의 제안이 아닌, 장인 공방의 소량생산이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하지만 장인정신이 담긴 소량생산 프로세스가 있다고 해서 지속적인 브랜드를 완성할 수 없다. 엔조마리가 강조한 또 다른 숙제는 대중의 인식을 지속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하나의 브랜드가 대중의 인식을 움직이는 것은 물론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오브제가 지닌 공예적 가치를 알리기 위해서는 교육 시스템이 밑거름 되어야 하고 다양한 형태의 워크숍, 전시기획 등이 필요한데, 이것들은 직접적으로 경제적 이익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쉽사리 투자가 이루어질 수 없다. 영리 사업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상품성과 이익실현에 집중하게 되다 보니 그 브랜드가 지닌 본래의 공예적 가치는 쉽게 잊혀지기 마련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브랜드는 조금씩 개성을 잃어간다.
1990년 엔조마리가 제안하는 프레임워크는 “공예적 가치를 널리 일”을 강조했다. 그는 대량생산의 시대에서 소규모 공방이 살아남는 이상적인 프로세스를 제안했는데, 20년 이상 이미 앞서간 그의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엔조마리가 제안하는 <이상적으로 공방이 살아남는 방법> - 프레임워크
-공방의 일부 활동은 박물관에 전시되는 전통기물을 만들거나, 오래된 문화재를 복원하는 등 역사적 헤리티지를 갖는 활동을 지속해야 한다.
- 일부는 현대적인 생산 기법을 도입해서 대중의 시장에 내놓을 상품을 생산한다.
- 일부는 교육기관을 설치하여서 수공예의 가치를 전승시키는 문화를 만든다.
- 교육기관은 일부 연구활동을 지원한다. 새로운 기술의 도입과 사회적 변화에 적응하는 생산모델을 고민한다.
이 중 특히 교육의 중요성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브랜딩의 힘을 그대로 보여준다. 역사와 이야기가 있는 “배움의 경험”이 소비로 이어지는 구조는 마치 인상 깊은 작품이 전시된 박물관을 관람하고 나오면서 굿즈를 사는 것이랑 닮아있다. 하나의 물건에 깃든 경험과 기억은 때로 그 물건의 물리적 특징을 중요하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다.
소위 “명품” 혹은 “럭셔리”라고 불리는 상품들이 다소 과한 포장을 동반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명품가방을 오로지 브랜드 로고하나만 박혀있다고 해서 구매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고급 가죽 위에 장인이 한 땀한땀 바느질하여 견고하게 만들어낸 과정을 알게 되면 조금 더 합리적인 구매라는 생각이 든다. 겹겹이 쌓인 박스를 언박싱하고, 고급스러운 종이 위에 프린트된 내용을 읽어 내려가면서 그 상품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스스로를 이해시킨다.
장인정신이 담긴 브랜드 경험은 오랜 역사와 전통의 스토리가 있어야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스티에드빌라뜨 는 1996년에 생긴 브랜드로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졌지만, 그 보다 훨씬 이전의 19세기 파리지앵 세라믹 아뜰리에가 지닌 이미지들을 브랜드 스토리에 담았다. 그릇에 관심 있다면 누구나 사랑할 수밖에 없는 ‘프렌치 엔틱’의 이미지를 그대로 브랜드에 담은 것이다. 여기서 구매로 이어지는 대부분의 제품은 가장 대중적인 크기의 접시와 컵이다. 하지만 소비자가 실제로 소유하는 가치는 그 이상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대중을 사로잡는지 보다는 얼마나 독보적인 정체성이 담겨있는지 이다.
한 사람의 취향이 확고해지는 과정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 원래부터 나는 이런 걸 좋아해~라는 말은 거짓이다. 비상한 취미가 있다거나 신기한 물건들을 수집하는 사람들은 보면 모두가 이유가 있듯이 한 사람이 가지는 취향의 발전은 사소한 이유로 시작해서 환경적 영향을 통해 점점 커져가는 이야기다.
정태영 부회장은 이런 말을 했다. 수치로 브랜딩의 효용성을 평가할 수 없다. 로열티(충성도)나 인지도는 설문이나 조사를 통해 인덱스로 가져올 수 있지만, 브랜딩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는 10퍼센트의 펜덤이 50퍼센트의 간접적 인지도보다 더 파워풀할 수 있다. 이것은 취향을 저격하는 작가의 작품을 보며 비싼 돈을 지불하더라도 구매하고 싶은 욕구의 크기 vs 대중적으로 큰 사랑을 받는 작품을 시장의 가격에 구매하고 싶은 욕구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과 같다.
확실한 건 지금의 사회는 더 취향이 다양해지고 확고해지는, 어찌 보면 옛날에 존재했던 보편적 대중성이라는 개념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통적 가치만을 고집하다 보면 현실의 대중이 원하는 니즈와 멀어지는 건 당연한 이야기다. 숭고함과 자부심이 담긴 전통적 공예품 들은 필연적으로 점점 더 예술품으로 여기 지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소수를 위한 예술품을 넘어서 대중을 위한 공예품을 만들고 싶은 작가들의 고민은 사실 꽤 오래된 이야기다. 브루노 무나리는 이 사실을 가장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아티스트가 지닌 숭고함과 독보적 존재감을 내려놓고 사회구성원으로 돌아와 이웃과의 관계를 되찾으며 대량생산된 상품을 통해 다수를 위한 예술을 창조하고 싶은 욕망”이라고 묘사된다. 무나리는 예술가 또한 그것이 장사가 되는 순간 겸손을 되찾아야 하며, 대중이 원하는 것을 고민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도 그렇게 예술가에서 디자이너가 되었다.
참조 : 브루노 무나리의 <예술로서의 디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