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 정착한다는 것은
더 늦기 전에 남겨보는 작년(2023) 한 해 베를린에서의 기억.
파리에서 베를린으로 이사 온 지 꼬박 1년이 지났을 때 이젠 정말 프랑스에 돌아갈 수 있을까 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여행으로는 어렵지 않게 드나들 수 있겠지, 하지만 어느새 익숙해져만 가는듯한 독일의 공기를 느꼈다.
많은 걸 배우고 경험했지만 독일어 실력은 제자리다. 생각해 보면 베를린에 온전히 머문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유럽을 누릴 수 있을 때 누리자 라는 생각으로 여기저길 다녔는데 정말 많이도 돌아다녔다. 그래서인지 베를린의 집은 온전하게 우리 집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나는 이런 “익숙하지 않음”이 좋다. 이런 게 역마살이라고 하던데 꼭 나쁜 의미만 있는 건 아닌듯하다.
여행의 설렘이 매일의 일상에 어느 정도 녹아들어 있는 걸 즐긴다. 아무리 해외생활이라 할지라도 “정착”이라는 단어가 주는 인상은 무겁고 지루하다. 그렇다고 나는 특출 나게 부지런한 성격도 아니다. 단지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은 미래를 위해 더 아껴두고 싶다.
반면 익숙해지는 과정을 즐긴다. 10년 전 교환학생으로 짧게 경험했던 베를린과 지금의 베를린이 너무나도 다르듯이 어떤 도시든 익숙해지는 과정에서 진짜 매력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동서가 나뉜 채로 긴 시간이 흘렀던 이곳은 그 독특한 배경에서 나오는듯한 자유로움이 있다. 파리에서 오래 거주하고 나니 더 선명하게 보이는 문화적 차이는 단순히 두나라 비교를 넘어서 유럽을 더 잘 이해하게 해 준다. 독일은 일 년 중 5개월이 겨울이라는 농담도 살아봐야 공감할 수 있다. 긴 추위에 익숙해지는 것 또한 매력적인 일이다. 한 겨울을 온전히 지내고 나니 하나의 큰 숙제를 끝낸 것 같았다.
그리고 2023년 한 해 베를린에서 쌓은 추억은 파리의 그것보다 훨씬 짧지만, 도시에 정착한다는 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아직 경험하고 싶은 일은 많고 살아보고 싶은 곳은 많지만, 베를린이라면 온전히 도시 그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인 정착지라고 생각했다. 베를린은 독일이 아니다. 독일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지점들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베를린은 베를린이다. 어쩌면 유럽의 어느 도시들 보다도 가장 고유한 정체성을 느낀다. 파리 혹은 런던 같은, 이미 아이코닉한 형용사가 되어버린 도시들은 마치 유명한 맛집들처럼 계속 가고 싶어 지는 곳들이다. 하지만 이미 아는 맛을 이기는 건 언제나 그렇듯 정의하기 애매한 독보적인 맛이다.
그리고 어느새 2024도 가을로 들어서는 지금, 나는 베를린에 없지만 조심스럽게 다시금 그곳으로 돌아가는 구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