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퍼니 포인트 (4) 내가 정중앙에 있을 때
회사생활을 하다 보니 어느덧 중간쯤 되는 위치에서 업무를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조직이나 프로젝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누가 의사 결정을 하고 누가 어떤 업무를 해야 할지에 대해 꽤 빠르게 익힐 수 있는 눈이 생겨 1인분 이상의 업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날들도 많았다. 다만 뭐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나니 어떤 일을 할 때 너무 많은 이해관계를 이해하고 그들의 이익들을 챙기려고 했는데 그럴 때마다 가끔 혼란스러운 상황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A 프로젝트를 더 큰 단위로 키워서 간다면 목표였던 a 뿐 아니라 b도 달성할 수 있고 개인적으로 할당된 매출도 원활하게 달성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다만 이를 상사에게 설명하였더니 팀에서 운영하고 있는 C 프로젝트와 충돌될 가능성이 있으니 A 프로젝트는 원 기획대로 가야 할 것 같다 의견을 들었을 때 아쉬운 마음도 있었다. 팀과 개인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내 상사는 이 일을 정정했을까?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아 골똘해지는 상황은 허리급 연차라면 누구나 겪어봤으리라.
며칠 전, 저녁까지 야근이 이어져 조금 산만해지길래 유튜브를 켰다. 그러다 아주 우연히 유튜버 '퇴사한 이형'의 <일 잘하는 대리의 특징>이라는 제목의 10분짜리 영상을 보게 됐는데 영상을 다 보고 나서는 하던 일을 모두 접었다. 롱 블랙에서 봤던 '유효한 결과를 내지 못할 거라면 무효한 일이다'라는 문장이 머릿속을 스쳤고, 동시에 '아 나 이 일 왜 하고 있지?'에 답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90년대 이후 한국에서는 '과장 바로 아래, 주임과 평사원 바로 위에 위치하는 고정된 직급'이라는 뜻으로 쓰이며 '과장대리'라고 불렸는데 점차 '대리'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회사마다 대리급의 연차는 천차만별이지만 보통은 3~7년 차 정도를 대리라고 부른다. 어느 회사나 대리급은 가장 바쁘다. 어느 정도 회사 생활을 해본 데다 회사의 구조나 일이 돌아가는 원리를 파악한 사람은 역시나 여기저기 불려 다니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물론 직급이 없는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내게 적용한다면 말년 대리 또는 갓 진급한 과장 정도가 되겠다.
현재 재직 중인 회사에 와서 세운 목표는 '큰 IP는 더 크게 만드는 사람, 작은 IP는 가능성을 찾아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각각의 전략을 세우며 할 수 있는 것들을 한 단계씩 해보며 목표를 달성해가고 있었는데 가끔 상사와 함께하는 티 미팅에서 이 얘기를 나눌 때면 좋은 얘기를 하고 있지만 어딘가 동떨어져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앞서 이야기했듯 '일이 되게 만드는 손'과 '전반적인 상황을 보는 눈'을 갖춘 지금의 나는 과연 대리로서 괜찮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
분명하게 바빴던 22년 2분기는 회사에 들어온 지 이제 9개월이 되어 차근차근 준비해온 일들을 터트리는 때였다. 그렇다 보니 많은 일들을 했고 보고를 하는 경우도 다수 생겼었다. 주간마다 팀에 보냈던 주간 보고와 그를 취합해 대표님께 보고한 주간보고를 비교해보니 내가 생각한 중요한 업무와 대표님 보고에 적힌 중요한 업무가 조금 달랐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내가 했던 일들을 나열해봤다.
분명 팀에 도움 되는 방향으로 업무를 해왔던 것은 맞지만 이 업무들 중 어떤 게 우선순위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순위를 매기기가 어려웠다. 부끄럽지만 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100% 달렸으니 당연히 야근이 많았을 수밖에 없었겠다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가만 보자, 팀의 목표 그리고 실의 목표가 뭐였더라?' 하며 최근 3년 간의 사업 보고서를 읽어봤다.
보고서는 그동안 해온 업무와 그를 통해 향후 어떻게 보완해서 목표를 달성했는지 작성하는 것이 기본이기에 22년 상반기 보고서에는 당연히 하반기에 해내야 할 일에 대해 적혀있었는데 살펴보니 올 하반기에 달성해야 하는 어젠다 9가지를 발견했다. 그리고 앞서 나열해본 내 업무들에 이 목표들 중 어떤 걸 달성하기 위한 것인지 적어보았다.
팀의 대리급 팀원으로서 내가 해야 했던 일은 상사의 일을 덜고, 상사의 일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금 헤아려보니 하반기에 어떤 업무들에 힘을 쏟아야 하는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왜 중요함을 판가름할 때 내 시선과 상사의 시선이 달랐는지를 그제야 알게 됐다. 그리고 가끔 내게 마케팅을 다시 할 생각이 없는지에 대해 물어보셨는지도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이것 참, 머리만 크고 곰처럼 움직이고 있었구나?
A를 시키면 A의 아웃풋만 나오는 신입 사원을 키우는 것도 새로운 매출원을 확보하기 위해 작게나마 가설을 검증하며 새로운 사업 구조를 짜는 것도 무턱대로 팀원들의 어려운 부분을 도와주는 것도 사실 내 머릿속에서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움직인 거였고 실제로 내 상사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시간을 아껴 우리에게 주어진 목표를 달성했다면 보다 나았으리라. (물론 팀의 활성화와 케미를 증진시키는 데에는 큰 도움을 줬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슬프잖아?)
그동안은 '이쯤 되면 나한테도 중요한 일을 맡겨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던 때가 많았다.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팀원으로서 직장인 최샐리에게 큰 자부심을 가져서였었다. 팀에 도움이 되는 방향을 생각하는 팀원은 소중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한몫을 했었고 말이다. 모든 일은 사실 나를 위해 한다. 회사를 다니겠다 선택한 것도 내 24시간 중 몇 시간을 이 일을 하는데에 쓰겠다 선택한 것도 그리고 오늘 점심과 저녁을 선택하는 것도 모두 나를 위해 한다. 그렇기에 '무엇을 위한 일인지'와 '누구를 위한 일인지'에 대해 시시각각 생각하는 힘이 필요하다.
이번 주는 '어떻게 해야 팀에 기여하면서 나도 한 꼭지 더 해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미 매 보고 시즌마다 해야 할 일들은 던져졌다. 그걸 꼭꼭 씹어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던 것일 뿐. 내가 대표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내게는 늘 상사가 있을 것이고, 그 상사는 원하는 바가 분명 있을 것이기에 지금부터 관점을 잘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주말에 일본 드라마 '중쇄를 찍자'를 보았다. 6편에서였나 '야스이'라는 과장-대리급의 인물이 나왔는데 그동안 팀원들에게는 비겁하다, 치사하다, 고효율만 따진다는 평가를 받아 최악의 캐릭터로 보였었으나 야스이가 그렇게 '되는 일'에 집착함으로 인해 안정적인 매출로 팀이 유지되고 다른 사람들이 도전을 할 수 있는 판을 깔 수 있었다. 나는 그 편을 눈시울을 붉힌 채로 봤다.
그제야 업을 사랑하고 일을 애착하는 마음, 그리고 아무도 모르지만 나와 일터를 지킬 수 있는 확실한 성공들이 눈에 들어왔다. 드라마 말미에 조용하게 야스이에게 고맙다고 얘기하는 편집장을 보며 그리고 그럴 줄 알았다는 야스이의 제스처를 보며 오열 아닌 오열을 했다. 야스이는 편집장을 대리해 일을 하고 있었다. 까다로움에 함께 일하는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야스이를 재평가하며 오늘의 포인트는 이렇게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