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난 뭐야? 아무것도 아니야?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나는 그에게 소리쳤다. 그가 한 행동, 그가 내린 결정에서 나의 존재는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커플들에게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내 마음은 몰라주니?” “왜 너만 생각해?” “우리가 남이니?” 이런 말들과 함께 서로가 상대방에게 첫 번째이기를 바란다.
영화 '미 비포 유'에서도 똑같은 상황에 놓인다. 다만, 남자 주인공이 ‘죽음’을 선택한다는 굉장히 극적인 상황이라는 점만 다를 뿐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살고 싶은 의지’를 불어넣어주고 싶은 바램이 있었지만, 남자는 고마워하면서도 결국 생을 포기하겠다고 말한다. 당연히 여자는 실망을 했고, 서운함에 휩싸여 마지막을 함께 해달라는 그의 청을 거절한다.
남자가 잘못했어. 왜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을 이해 못해줘? 자신이 힘들다고는 해도 함께 이겨내면 되잖아.
이 영화를 끝까지 보지 않았다면, 나는 이렇게 그를 비난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득, 여자의 갖은 노력이 남자에게도 최선이었을까, 상대방을 위한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But I can make you happy.” 라는 그녀의 외침 속에는 (In my opinion)이 고스란히 숨겨져 있지 않은가.
동반자라는 생각 때문에 때론 상대방이 자기 자신보다도 나를 먼저 생각해주기를 바라진 않았는가. 그걸 사랑으로 여기고, 그렇지 못한 상대방에게 사랑을 하지 않는다며 비난하지 않았나. 나는 정말 그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는가.
여전히, 함께 하고 싶다는 상대방에게 이별을 고하는 것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자유의 몸이 매일 아침 쇠사슬에 묶이는 것을 느끼는 그에게, 그게 너무나 심한 고통으로 느껴지는 그에게 “그럼에도 참아보자.”라고 할 수 있을까. 선택은 자기 자신이 하는 것. 육체적 한계를 깨부수면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모두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사는 거니까.
사랑이라는 명목 하에, 내가 생각하는 더 좋은 길을 상대방에게 제안할 순 있지만 강요할 수는 없다. 사랑은 함께 하는 것이라고, 그렇기에 모든 선택도 함께 해야한다고 강요하는 순간 그들 사이에는 서운함의 감정이 뿌리 내리고 말 것이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서로의 선택을 응원해주는 것. 그게 더 성숙한 사랑이라고.
‘라라랜드’에서 남녀 주인공이 각자의 길에서 잘 살아가는 서로를 향해 미소지은 것처럼, ‘미 비포 유’에서 여자 주인공이 결국엔 남자 주인공의 마지막을 함께 했고, 남자 주인공도 마지막까지 여자의 자유로운 인생을 응원했던 것처럼,
사랑은 그런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더 성숙해지고 있다.
포스터만 보고는, 너무 로맨틱할 것만 같아서 내 취향이 아니라고 치부했다. 그래서 남자친구가 오래 전부터 같이 보고 싶은 영화라며 나에게 계속 제안했음에도 쿨하게 거절했었지. 미안해.
영화는 분명히 로맨틱 했지만, 사랑의 달달함에 녹아내릴 듯 사탕 같은 영화는 아니었다. 대신, 그와 내가 함께 하고 있는 어제와 오늘, 미래를 곱씹어보게 하는 영화였다. 때론 쓰기도, 마음이 저리기도 하지만 결국엔 미소짓게 만든 영화.
그들은 결국 헤어졌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 그대로를 인정했고, 그렇게 더 사랑할 수 있었으니까. 그 둘 사의의 공간은 한없이 멀어졌지만, 마음은 영원히 하나가 되었다.
오늘의 OST는 Ed sheeran의 <photograph>. 사진으로 서로를 기억하자는, 추억을 간직하자는 가사의 노래가 영화 속에서 어찌나 절절하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