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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coming Dec 13. 2020

사이코메트리 눈사람

H에게


 밤 사이 첫눈이 내렸어. 아스팔트 도로에도, 차가워보이는 금속 재질의 차 지붕들 위에도, 앙상해졌던 나뭇가지 위에도 공평하게 새하얀 솜이불이 한 꺼풀 겹쳐졌지. 이렇게 눈이 쌓인 날이면 난 가끔 너를 떠올리곤 해.

 

 우리는 오랫동안 같은 아파트 한 동에 살았지. 초등학교 때 우리는 학교에서부터 아파트 단지의 가장 먼 끝까지 이어지는 등하굣길을 공유했고, 고등학교 때에는 자연스럽게 스쿨버스 메이트가 되었어. 차가 도착했는데 둘 중 한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무슨 일이 있는지, 혹시 지금 뛰어오고 있는 건지 확인하는 임무를 저절로 수행할 수밖에 없었지. 버스를 놓칠까 조마조마해하면서 다급히 뛰다가도 너의 전화가 오면 무슨 수를 써서든 꼭 받았어. 숨이 차서 헉헉 대며 별다른 대답을 못해도 너는 알아듣고 "기사님! 수미 지금 뛰어오고 있대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라고 말해주곤 했었지. 나 역시 젖은 머리로 허겁지겁 달려오던 너를 위해 버스를 얼마간은 붙잡은 적이 있었고.


 이런 최상의 지리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 번도 서로의 가장 친한 친구는 아니었어. 난 늘 내 얘기에 잘 웃어주는 친구들을 좋아했고, 너는 언제나 내 말에 가장 박장대소를 해주던 아이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야. 이미 서로의 베스트 프렌드가 정해져 있는데, 잘 정리되어 있는 관계들을 흩뜨리기엔 우리의 우정이 약했던 걸까? 계속해서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을 수밖에 없어서, 약간은 마음의 거리를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저절로 생각하게 됐던 것일까.


 얼마 전 문득, 안부가 궁금해서 메신저 친구 목록에 너의 이름을 검색해본 적도 있단다. 프로필 사진 속에서 너는 내 실없는 개그에 깔깔 웃던 그 표정 그대로 남편의 손을 잡은 채 미소 짓고 있더라. 그대로 곧장 안부 인사라도 한 번 전했다면 훨씬 빠르고 간편했을 텐데, 이렇게 보여주게 될지도 불확실한 편지를 쓰고 있네. 터치 몇 번이면 쉽게 연락할 수 있는 세상에서, 그 쉬운 일을 너무 오랫동안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우리 사이를 좁히는 걸림돌이 되는지도 모르겠어.


 하얗게 물든 동네를 둘러보다 너를 떠올리게 되는 이유는 단순해. 눈이 내린 다음 날, 볕이 잘 들지 않는 구석에는 꼭 누군가 만들어둔 삐뚤빼뚤한 눈사람이 소중히 놓여있거든. 어렸을 적 우리가 그랬듯이 말이야. 깜깜한 밤 첫눈이 펑펑 내리며 빠르게 쌓이던 그날 밤을 기억해? 다른 친구들을 모두 제쳐두고 나는 너를 가장 먼저 떠올렸어. '우리 지금 눈사람 만들래?'라는 문자에 곧바로 '그래!'하고 달려 나올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친구가 너라는 것을 사실은 항상 기억하고 있었던 거지.


 그날 우리는 콧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겠다고 한참이나 눈덩이 공을 굴려댔어. 욕심이 너무 커서 눈덩이 위에 또 다른 눈덩이 하나를 제대로 올리기는 했는지, 눈사람에 제대로 눈코 입은 그려주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 하지만 뺨도 손도 꽁꽁 얼고, 바지 밑단과 운동화가 푹 젖도록 눈을 맞으면서도 뼛속까지 시릴 만큼 즐거웠던 기억은 또렷해. 끌고 들어간 젖은 눈에 엉망이 될 현관과 엄마의 불호령, 다음 날 걸리게 될 감기 같은 건 미리 고민하지 않았지. 씩씩하게 들이마시고 내뱉었던 그 겨울의 상쾌한 공기가 아직도 내 몸 어딘가에 남아 감돌고 있어.


 이제 나는 그때만큼 눈 오는 날을 좋아하지 않아. 길이 미끄럽고 질척거릴 것을 미리 걱정하는 어른이 되어버렸거든. 겨울을 실감하게 되면 길 위나, 추운 공간에서 또 하루를 버텨야 하는 동물들과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이제 너무 잘 알기도 하고. 또, 우리가 함께 눈사람을 만들고 난 뒤의 겨울들은 유약한 나에게 대체로 힘든 기억이 많아서인지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지레 움츠러들어버려. 나에게 겨울은 아주 작게 몸을 말고서 걱정만 많아지는, 내가 좀 한심해지는 계절이 됐어.


 그래서 오늘 낮, 짧은 산책길에 누군가 밤새 부지런히 만들어둔 눈사람을 보고, 너를 떠올리게 되어 참 반가웠어. 어느 겨울날, 싱싱하고 해맑았던 내 마음이 기억나서. 그 장면을 함께 공유하는 사람이 어딘가에서 잘 존재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고마워서. 소중한 기억을 많이 붙들고 있을 수록 행복하고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잖아. 걱정과 나약함 사이에서 축 쳐지기 쉬운 겨울, 눈사람은 순식간에 내 마음 속 가장 밝은 장면에 조명을 비춰.


 투명하고 유쾌했던 우리의 어느 시절을 내가 기억한다는 것이 너에게도 힘이 될 수 있을까? 눈이 내리면 너도 가끔 그 날을 생각하는지 궁금해져. 사진 한 장만 보고 마음대로 짐작해버렸지만 내가 상상하는만큼, 아니 그 이상 네가 잘 지내고 있으면 좋겠다. 주위 사람들까지 세 배쯤 기분 좋게 해 주었던 너의 커다란 미소가 그리운 날이야.




                                                       2020년 12월 13일 

                                                     눈사람 메이트, 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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