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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coming Dec 16. 2024

부끄러움이라는 응원봉을 켜며

Chopin - Ballade No.1 in G minor Op.23


지금까지 연주 경험이 많지 않은데 비해 망한 연주에 관한 기억은 많은 편이다. 그중에서도 대학교 3학년 연주 수업 때 쳤던 쇼팽의 발라드 1번 연주는 언제고 떠올리면 손에 식은땀이 맺힐 정도로 강렬히 망했다. 기교 높은 패시지가 워낙 많은 곡이기도 했지만, 긴 호흡의 곡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풀어가야 할지 찾지 못했기 때문에 소화하기 어려웠다. 어려운 구간을 기계적으로 반복 연습한다 한들, 한 덩어리로 조화롭게 엮을 수 없었던 것이다.


쇼팽의 음악에는 마치 물감 한 방울이 톡 떨어져서 그림 전체를 연한 회빛으로 물들이는 듯한 비애의 정서가 기본적으로 깔려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줄곧 나는 그 슬픔이 정확히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슬픔의 이유와 결은 무수히 다양한데, 그의 애수는 마냥 비탄에만 빠져있지도 않았다. 어쩔 때는 처절한 분노로 성큼 건너가기도 하고, 갑작스럽게 아름다움에 취하기도 했다. 도대체 어떤 슬픔의 걸음걸이가 이렇단 말이야? 종종 골이 났다. 그저 남들의 연주를 열심히 귀동냥해서 실에 매달린 마리오네트처럼 치는 수밖에 없었다. 발라드 1번을 접했을 때도 그랬다. 음울한 듯 시작된 이야기가 좀 따뜻해지나 싶더니, 신경질적으로 고조되고 아름다운 꿈결에도 들렀다가 격정적으로 쏟아부으며 맺는 이 기복 심한 음악을 무엇으로 꿰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리스트는 '잘(zal)'이 ”쇼팽의 모든 작품을 때로는 차가운 은빛으로, 때로는 뜨거운 빛으로“ 물들인다고 말했다. 폴란드어로 ‘슬픔’ ‘후회‘ ’아픔’을 의미하며, ‘분노‘ ’울분’이라는 뜻도 담겨있다는(『쇼팽의 낭만시대』) 이 말에서 모종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나는 대외적으로는 쾌활해. 특히 내 사람들하고 있을 때는 더 그래. '내 사람들'이란 모든 폴란드인을 두고 하는 말이야(쇼팽은 이 표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부연 설명을 한다). 하지만 내 존재의 깊은 곳에서 뭔지 모를 것이 나를 괴롭혀. 좋지 않은 예감, 불안 같은 게 있어. 악몽을 꾸든가, 그게 아니면 불면에 시달리지. 가끔은 모든 일에 무관심해지고, 가끔은 극심한 향수병을 앓지. 나는 살고 싶지만 또 그만큼 죽고 싶기도 해. 때로는 완전히 무감각한 상태에 빠지는데 그게 기분 나쁘지만은 않지만 내가 그냥 아예 없는 사람처럼 느껴져. 그러다 문득 아주 선명한 기억이 떠오르면서 괴로워지는 거야. 미움, 회한, 온갖 병적인 감정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날 괴롭히고 진 빠지게 해."

_ 알프레드 코르토, 『쇼팽을 찾아서』 중


쇼팽의 정서를 지배했다고 알려진 ‘잘‘은 조국 폴란드의 역사와 면밀히 맞물려있다.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같은 강대국에 둘러싸여 숱한 침략과 억압을 겪어온 폴란드는 1795년, 세 번째 분할 점령을 거치면서 아예 지도에서 사라졌다. 쇼팽이 태어났을 무렵, 나폴레옹의 지원으로 바르샤바 공국(1807-1815)이 설립되어 잠시나마 이전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지만 평화는 오래가지는 못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이 실패하면서 폴란드는 제정 러시아의 속국이 되었고, 쇼팽은 강한 감시와 통제가 일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스무 살이 되어 음악가로서 주목받고 본격적으로 커리어를 쌓을 시기가 되자, 쇼팽은 음악 도시 빈으로 떠날 결심을 한다. 1830년 11월 2일 아침, 고국을 떠나는 그에게 친구들과 스승 엘스너는 이별의 칸타타를 불러주며 폴란드의 흙이 가득 담긴 은잔을 건넸다. 언제 어디에서나 폴란드를 잊지 말라는 당부였다. 일주일 뒤, 빈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고국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쇼팽과 동행했던 절친한 벗 티투스는 혁명에 참여하기 위해 돌아갔지만 쇼팽은 티투스의 만류로 빈에 남았다.


쇼팽이 겪었을 상황은 나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다. 우리나라 역시 식민 지배의 역사부터 분할 통치, 분단의 아픔까지 겪었음을 교과서에서부터 숱하게 배웠고, 영화나 소설 등 각종 콘텐츠로 만들어져 익히 되풀이하고 있으니 말이다. ‘잘’을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하기는 쉽지 않은데, 우리말 가운데 ‘한‘이라는 단어와 근접하다는 분석도 존재할만큼 이 감정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가깝게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좀 쇼팽의 마음을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싶어 졌을 때, 또 다시 막막해졌다. 국가적 차원의 실존 위기를 직접 경험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나라‘에 닥친 거대한 위기 상황에 대해 사유할 새 없이 너무 관성적으로 듣고 표면적으로만 학습해 왔던 걸까. 그것이 나를 통과했을 때 내면에 어떤 구체적인 일들이 벌어지는지는 오히려 더 짙은 안개에 가려진 느낌이었다.


물음표를 안고 지낸 지 몇 달쯤 지났을 때, 국가적인 위기가 나를 관통하는 사건을 비로소 직접 경험하게 됐다. 2024년 12월 3일 밤, 계엄령이 선포된 것이다. 그날 밤, 나는 ‘반국가‘ ‘처단‘ 같은 말들을 쥐고 얼떨떨해하며, 유튜브 생중계를 통해 국회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 국회에 들어가지 못한 국회의원들을 막아선 경찰들, 국회로 진입을 시도하는 무장한 군인들, 그 사이로 몸을 끼워 넣으며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가려는 국회의원들의 모습이 마치 검은 소용돌이처럼 보였다. 그 가운데에서 놀라웠던 건 맨몸으로 장갑차 앞을 막아서거나 무장한 군인들과 맞서던 평범한 시민들의 모습이었다. 내가 두려움과 당황스러움에만 사로잡혀 있던 사이, 어떤 사람들은 현장의 한가운데로 망설임 없이 달려갔다. 역사에서 목격한 잔혹한 일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공포가 내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되는 사이, 어떤 사람들은 또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지 않냐면서 총부리 앞에서 직접 목소리 내어 질책하거나 달래고 있었다. 그 시민들이 실질적으로도, 상징적으로도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어떤 위험 앞에 맞선 것이었는지는 일이 종료된 이후에 더욱 구체적으로 알게 됐다.


그러한 순간이 오면 나와, 소중한 사람들의 안위를 걱정하게 되리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모멸감이 들 수 있으리라는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라에 닥친 어떤 위기가 나처럼 사사로운 개인에게까지 즉시 무언가를 선택하도록 종용할 것이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그날, 차를 몰고 향했다면 국회 앞은 나에게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조마조마해하면서 휴대폰 화면으로 경찰, 군대와 마주 선 사람들이 다치치 않고 잘 버텨주길 바라는 쪽을 나는 택했다. 누군가가 대신 위험을 감수하도록 맡겨두고 안전한 곳에 숨어있다는 부끄러움이 이토록 생생할 줄은 몰랐다. 이 부끄러움은 잠시 또렷했다가 사라지고 말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부끄러움에 자주 휘감기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이 감정에 대해 한 번쯤은 생각해보고 싶어졌다.


부끄러움은 마음과 행위의 거리가 멀 때 발생한다. 이 감정을 소멸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마음의 명령을 따라 실천하거나, 마음을 바꿔먹으면 된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부끄러움이라는 거스러미가 작게라도 일어날 때마다 나는 어느 쪽도 따르지 못했다. 마음을 바꾸지는 못했으면서 나를 괴롭게 한 일이 없었던 것처럼, 그런 일을 외면해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인 것처럼 굴며 사는 때가 많았다. 하지만 해소되지 못한 부끄러움의 찌꺼기는 서서히 응축되어 얹힌 것처럼 속을 콕콕 찌르곤 했다. 가엾은 존재들, 돕고 싶은 사람들, 누군가는 나서야 하는 일들을 보며 순간적으로 괴로워하지만, 상황을 달라지게 할 수 있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는 괴리. 이 간극이 반복될수록 스스로를 좋은 사람으로 인식하기 어려웠다. 이대로 간다면 부끄러움을 공장처럼 대량 생산하고, 그것을 가뿐히 외면하는 자동 처리 시스템까지 완비한 무감하고, 무력하며, 무의미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었다.


부끄러움이라는 맥락에서, 내가 잠시나마 놓였던 상황이 쇼팽의 처지와 겹쳐지는 부분이 있을 것 같았다. 쇼팽에 관한 몇몇 기록과 그가 남긴 많지 않은 글을 미루어보았을 때, 그에게도 마음과 행위 사이에 제법 널찍한 간극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1931년 7월, 파리로 향하던 길에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한 쇼팽은 바르샤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곧장 일기에 이처럼 뜨거운 감정을 쏟아부었다.

"(...) 아마 이젠 내겐 어머니도 없고, 아마 어떤 러시아 놈이 어머니를 살해했을지도 모른다. 누이들은 미친 듯 저항하고 아버지는 절망에 빠지고 아버지가 하실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고. 그런데 나는 여기 있어. 아무짝에도 쓸모 없이! 속수무책으로 여기 있어! 가끔씩 괴로워 신음하고 고통스러워 할 뿐, 그리고 내 절망을 피아노에 온통 쏟아 부을 뿐."

_ 제러미 니콜러스, 『쇼팽, 그 삶과 음악』 중


청년의 가슴은 분노와 절망으로 들끓었다. 그의 일기를 보면 피아노를 치고 작곡하는 일이 나라를 위해 직접 나서는 실천에 상응하는 행위라고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쇼팽은 앞에 나서서 직접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자신의 묵은 감정들을 승화하거나 해소하는 활동가는 아니었다. 심지어 그의 생에는 이해되지 않는 모순도 존재한다. 1833년, 러시아가 폴란드인 망명자들에게 사면령을 내려 귀국의 문을 열어주었는데도 그는 죽기 전까지 한 번도 고국땅을 다시 밟지 않았다. 여러 번 가족을 그리워하고, 향수병을 토로했으면서도 말이다. 이런 사실이 쇼팽의 애국심을 부정할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의 내면에 끓어오르는 생각들과 그가 택한 현실 사이에는 괴리가 분명히 존재했으며, 내가 만약 쇼팽의 입장에 처해있었다면 그 괴리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일종의 괴로움이나 부끄러움, 자책감 같은 것들을 앓았으리라는 이해가 든 것이다. 쇼팽의 음악에서 번져오는 쓸쓸함은 외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 생겨나는 물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로소, 쇼팽을 향해 동질감에서 우러나는 사랑이 맺히기 시작했다.


슈만에 따르면 쇼팽은 ‘발라드‘라는 단어를 음악에 처음 적용한 인물이다. 19세기까지 발라드는 문학 장르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그는 빈으로 거취를 옮긴 다음 해인 1931년부터 발라드 작곡에 착수했다. 쇼팽이 쓴 네 곡의 발라드는 “서정적, 서사적, 극적 에피소드들이 서로 대조를 이루면서 펼쳐지는 이야기”적 특성을 한 곡 안에 상이한 음악적 요소들로 조합했다. 네 곡 모두 폴란드의 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츠가 쓴 민족주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자신의 곡에 표제를 붙이는 것조차 꺼려했던 쇼팽은 시의 줄거리를 음악에 고스란히 반영하는 방식으로 작곡하지는 않았다. 작곡 배경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많지 않아서 연주자에게는 해석의 자유와 무게감을 동시에 안겨주는 곡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발라드 1번은 내내 숫기 없던 사람이 묵혀왔던 속내를 털어놓는 듯한 서주로 시작되고,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는 아지랑이 같은 그리움과 처절한 고국의 현실, 그리고 자신이 속해있는 파리의 화려함 간의 대조처럼 상반된 빛깔의 이야기가 밀물과 썰물처럼 오간다.


만약 발라드 1번을 부끄러움이라는 나의 관점으로 끌어와 꿰어본다면, 이 곡이 왜 한 덩어리로 반죽하기 어려운 들쭉날쭉한 파편들의 모음처럼 느껴졌는지 좀더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의 내면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영화 <동주>에서 나라를 빼앗기는 고통에 분노하고 이를 고스란히 행동으로 옮기는 송몽규의 감정선은 모든 갈래가 이질감 없이 균일하다. 그러나 윤동주는 조국의 운명에 슬픔을 느끼고, 부당한 현실에 분노하다가도 시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뺏기고, 시를 쓰는 행복을 조금만 더 누리고 싶어 한다. 나라를 사랑하지만 시도 그만큼 사랑해서, 그는 자주 부끄러워한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이 비겁한 사람일까? 부끄러움이란 안전한 곳에서 관망하는 자의 사치일까?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같은 영화 속에서 정지용 선생도 윤동주 시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부끄러움을 모르는 놈들이 더 부끄러운 거지.” 계속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은 그 작은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지켜온 사람이기도 하다. 부끄러움이 성가셔서 마비가 되는 쪽을 택하는 것도 얼마든 가능하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속 인물들은 집 바로 옆 담장 너머에서 대거로 유대인 학살이 이뤄지는데도 무감각하게 그곳에서 나오는 물건들로 공짜 사치와 향락을 누린다. 반면 부끄러움이라는 작은 불에 오랫동안 데워진 마음은 때로 더 뜨겁게 달아오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시대의 아픔을 녹여낸 윤동주의 시가, 조국의 운명에 대한 혼란과 절망과 분노가 짙게 배어있는 쇼팽의 음악이 지금까지도 우리 곁에 계속해서 남아있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현대에 쇼팽이 폴란드의 민족성과 독립정신의 숭고한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것과 다르게, 폴란드 정세가 위태롭던 당시에는 파리에 머물던 쇼팽을 향한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파리로 망명한 폴란드 사람들과 그의 지인들 사이에서는 쇼팽이 “혁명과 그로 인한 혼란에 흥미조차 없다는 의혹(『쇼팽의 피아노』)“이 제기되기도 했다. 아마 그가 어떤 활동에든 직접 나서지 않는 것은 물론, 반체제 인사들이 사용할 찬가나 애국가 작곡 의뢰에도 응하지 않았기 때문일지 모른다. 하지만 쇼팽은 폴란드 이민자를 위한 기금 마련 연주에는 참여했다. 쇼팽이 평생에 걸쳐 천착했던 마주르카와 폴로네즈는 폴란드 민속 춤곡의 일종이었다. 그가 남긴 무수한 음악들은 그의 그리움과 향수가 언제나 조국을 향해 있었고, 그가 폴란드의 운명에 분노하고 상심하는 한 국민이었다는 사실을 의심할 여지 없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정치적인 투사로서 몸소 앞장서 활약하지 않았음에도 쇼팽의 음악은 폴란드 사람들에게 지금까지도 심장과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그러니까 모두가 최전선에 뛰어드는 혁명가가 될 수는 없더라도, 자기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보는 것. 스스로가 여기까지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기준선을 두고 다시 고민하며 그 선을 조금 더 밀어보는 것, 그러다 다시 한발 물러서기도 하는 것. 그것이 부끄러움을 앓는 사람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이 아닌가 싶어진다. 계엄령 당일, 집에서 지켜보기만 했던 내가 처음으로 광화문과, 국회 앞으로 나가 집회에 참여했던 것 역시, 앞장서지는 못했으나 시종 지펴지던 작은 불꽃의 뭉근한 열기에 못이겨 뒤따르는 용기라도 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강 작가의 말을 빌려 어느 과거들이 현재를 구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고, 누군가의 오늘을 망가뜨리는 과거로 남지는 않겠다고 화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음만큼 뜨겁게 즉각적으로 행동하지는 못할지라도, 비록 부끄러움이나 자책감에 뭉근히 끓어올라 행하는 작은 실천은 나를 쉬이 식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러한 느긋한 보법으로 걷다보면 어느 날엔 문득, 결국 제자리에 있는 듯한 기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발버둥 치며 이리저리 돌고 돌아본 사람의 동선은 한 자리에만 무심히 안주했던 사람의 것과 결코 같지 않다. 쇼팽이 파리로 떠난 뒤 한 번도 폴란드로 돌아오지 않았다 해도, 그가 파리에서 폴란드를 그리며 쓴 음악들이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파동을 일으키는 것처럼. 물론 이런 생각의 구불길들을 거치며 탐구해본 것과 내가 쇼팽 발라드 1번을 더 잘칠 수 있게 되었느냐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제야 이 곡을 연습할 수 있는 사적인 시작점을 찾았을 뿐, 피아노 연습은 반복과 꾸준함의 영역이기 때문에 지금도 나에게는 얼마든지 망한 발라드 1번 연주가 가능하다. 그럼에도 이제는 막막하기만 했던 곡을 연습하는 동안, 쇼팽이 투영했을 그의 내면에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공감하기도 한다. 쇼팽의 곡을 눈앞에 두고 오랫동안 바라왔던 소망 하나가 이루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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