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zart - Piano Sonata No.18 K.576
피아노를 일찍부터 좋아하게 된 어린이에게는 한 가지 숙명이 주어진다. ‘리스트는 여섯 살 때 아버지가 연주하던 피아노 협주곡의 피아노 파트를 외워 흥얼거렸다’라던지, ‘베토벤, 쇼팽은 일곱 살 무렵에 첫 공개 연주회를 가졌다’ 혹은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세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다고 전해진다 ‘는 둥 경이로운 신동 신화에 둘러싸이게 되는 것이다. 그들과의 얼마 되지 않는 나이차를 손가락으로 셈해보면서 살짝 주눅 든 채로 나에게도 그런 재능 하나쯤은 있겠지, 생각했다. 머지않아 그 정체를 발견하리라 기대하면서.
노력에 비해 무언가를 어느 정도 쉽고 능숙하게 해낼 때 으레 “너 재능이 있구나”라는 얘기를 듣는다. 나는 선택의 기로에서 재능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는 쪽을 골라야 인생이 그나마 쉽게 풀릴 거라 믿었다. 안 되는 걸 더 해보겠다고 애쓰느니 애초에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를 잘 따져보면 효율적이고 안전하게 삶이 흐를 거라고. 그렇게 ‘재능만능주의자’가 된 나는 잠들기 직전까지 배 위에 손가락을 올려두고 그날 배운 곡을 꼬물꼬물 연습할 정도로 피아노를 좋아했으면서도 피아니스트의 길을 깨끗하게 단념할 수 있었다. 스스로에게 재능이 없다는 판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8번 K.576 1악장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예중 입시를 준비하면서 만난 레슨 선생님이 점지해 준 곡이다. 맡아줄 선생님을 알아보는 동안 전공 준비를 시작하기엔 ‘늦었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던지라 부랴부랴 스펙을 쌓기 위해 콩쿨을 준비했다. 그런데 피아노 학원에서 명랑하게 쳐댔던 모차르트의 곡이 전공을 본격적인 목표로 삼으면서부터 알 수 없는 미로처럼 변질되어 갔다. 대체 “모차르트 같은 소리를 내라”는 게 무슨 뜻인지, 같은 길이의 음표인데 왜 어느 것은 통통 튀듯 짧게 치고 어느 것은 지그시 누르는지, 비슷한 모티브가 반복되면 더 크게 강조하는 게 맞는지, 작게 메아리처럼 쳐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운 것 투성이었다.
일단 늦깎이 지망생은 선생님의 지시대로 외워서 연습하는 수밖에 없었다. 피아노와의 끈끈했던 관계는 묘하게 일그러져갔다. 전에는 주말 내내 몇 시간씩 피아노만 쳐도 즐거웠는데, 건반 앞에서 한숨을 쉬거나 엎드려 조는 날이 생겼다. 동경했던 피아니스트들처럼 음악에 푹 빠져 연주하고 싶었는데 두터운 벽만 더듬거리며 입구도 못 찾는 기분이었다. 마음 한켠엔 ‘만약 피아노에 재능이 있었다면 이렇게 답답하고 괴로웠을까’라는 자기 의심이 자꾸만 똬리를 틀었다. 두 번의 콩쿨, 한 번의 동상. 나에게 가장 처음 피어났던 오랜 꿈을 부산스럽게 정리하고 일반 중학교에 진학했다.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는데 결정적 계기가 된 이 곡은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중에선 마지막 작품이다. 나의 재능 없음을 매일 마주하면서 천재 중의 천재가 남긴 곡을 연습하는 일은 일종의 확인사살처럼 느껴졌다. 세 살 때 누나 ‘난네를’의 피아노 연습을 보고 들으며 스스로 건반 다루는 법을 깨우쳤다는 전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시름시름 앓으면서도 ‘작곡을 하는 편이 쉬는 것보다 피곤하지 않다’며 끝끝내 곡을 썼던 지독한 천재. 다시 태어나도 내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며, 재주 없는 평범한 인간의 고충은 손톱만큼이라도 헤아릴 리 없을 상대였던 모차르트는 동경하는 동시에 좀 얄미운 대상이었다. 그래봤자 모차르트는 영화 <아마데우스> 속에서처럼 까르르 웃고 말 것 같았지만.
시간이 흐른 후, 다시 한번 피아노를 제대로 쳐보고 싶다는 내면의 어떤 부름에 이끌려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가장 먼저 손이 간 것은 뜻밖에도 이 악연 같은 곡이었다. 누군가가 곁에서 알려주는 돌이나 길만 밟으며 오르는 지름길 말고, 내 힘으로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탐구해보는 이 곡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이 곡을 쓸 때의 모차르트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막연하게 상상했던 것처럼 떠오르는 악상을 흥얼거리며 막힘없이 경쾌하게만 작곡했을까? 어떤 열망이 있었기에 천재라는 찬사와 사랑으로 충만했던 황금빛 어린 시절의 기억을 생생하게 안은 채 생활고와 냉랭한 반응 속에 생을 마감하는 굴곡의 짧은 생 안에서 대작들을 다수 포함해 작품 번호가 붙은 곡만 626곡을 남길 수 있었던 걸까? 그 속에서 이 음악은 곡의 주인과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을까?
한 번도 수정한 흔적 없이 마치 받아 적은 것처럼 깔끔하더라는 자필 악보 같은 일화들은 천재를 지나치게 신성시하고 우상화하게 만든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도 영감을 아무런 세공 없이 그대로 내놓을 수는 없다. 오히려 진정으로 뛰어난 예술가들은 세공의 대가일 확률이 높다.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저서 <모차르트, 사회적 초상>에서 하나의 예술 작품이 탄생하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예술가의 머릿속에 어렴풋한 영감, 환상이 떠오르면 그간에 성실하게 습득한 예술적 재료를 활용해 그 환상을 타인의 공감을 받을 수 있는 형태로 변형해서 현실에 실현하는 것이라고. 이를 모차르트의 얘기에 적용해 보면 이렇다. 그의 이름 앞에 늘 따라붙는 ‘천재’라는 수식어 안에는 음악가이자 음악교육자였던 아버지로부터 아주 어렸을 때부터 혹독하리만치 음악에 대한 지식을 배웠던 치열한 시간이 가려져 있다. 그리고 마치 신이 흥얼거리는대로 받아적은 것처럼 보이는 그의 음악적 결과물들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음악적 환상을 청중이 바라는 범위 내에서 가장 절묘하게 구현하고자 투쟁한 산물인 것이다.
감상자의 반응과 자신의 환상 사이에서 모종의 균형을 잡는 것이 예술가의 본분이라면 모차르트는 본래 전자에 더 능숙하도록 길러진 인물이다. 시민 계급 출신으로서 안정적인 궁정 예술가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강한 출세욕을 보였던 아버지 슬하에서 주문자들, 즉 궁정 사람들과 귀족층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곡을 쓰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차르트가 성인이 되면서 변화의 기미가 일어난다. 자신이 나고 자란 잘츠부르크라는 도시를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가장 표면적인 이유는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을 못마땅해하며 허용하지 않는 콜로레도 대주교였다. 잘츠부르크에 대한 모차르트의 노골적인 불만과 염증은 그가 1778년 9월 아버지에게 쓴 편지에도 잘 드러난다.
“잘츠부르크에서 염증을 느끼는 오직 하나의 일을 토로한다면, 사람들과 제대로 사귈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음악이 조금도 존경받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대주교가 여행을 해본 적 있는 현명한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는 겁니다.”
1981년, 대주교와의 불화를 계기로 시작된 모차르트의 자유 음악가로서의 길에는 두 가지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잘츠부르크의 명성을 높이는 방편으로만 천재 음악가를 이용하고 싶어했던 콜로레도 대주교뿐만 아니라, 잘츠부르크의 안정적인 일자리에서 수익을 내며 가계에 보탬이 되라고 끊임없이 독촉하는 아버지 또한 모차르트가 벗어나고 싶었던 대상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모차르트에게 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줄곧 그의 음악 선생님이자 선배 음악가, 연주 여행의 매니저, 그리고 친구였다. 사랑과 관심을 받으려는 성향이 강한 아이와, 아들의 천재적 재능에서 장밋빛 미래를 그렸던 아버지의 결속은 굳건했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서부터 아들과 아버지의 원하는 바는 차츰 어긋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방탕한 꿈”이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 소속된 안정된 직장 대신 유럽 도시 곳곳을 누비며 작곡자이자 연주자로 먹고살 미래를 꿈꿨다.
부모가 극구 만류하는 일을 끝끝내 감행하겠다는 것은 더 이상 다른 지배자가 내 삶을 휘두르게 두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말 잘 듣는 아이일수록, 헌신적인 부모일수록 이 분리는 더욱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하지만 삶의 주인이 자신 한 사람 뿐이라는 사실을 새삼 뚜렷하게 자각하게 될 때, 비로소 자아가 선명해진다. 피와 살을 물려받고 수많은 정신적 유산들을 물려받아 자라나지만 부모와 자식이 결국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생에서 벌어지는 비극이자 묘미일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궁중과 귀족들의 곁에 섞여 왔지만 신분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혀 늘 종속된 입장에서 음악을 해야 했던 사회 구조적 상황에서의 탈피는, 평생 자신에게 강한 영향력을 미쳐온 아버지로부터의 독립으로까지 이어졌다.
1781년 이후 모차르트의 삶은 음악으로 돈을 벌기 위한 분투로 점철되었다. 자유 음악가라고는 했지만 자신이 존중받으며 일할 수 있는 곳이라면 구직 활동도 끊임없이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정말 쓰고 싶은 작품으로 인정해줄 주문자, 관객, 도시를 찾아헤맸다. 어쩌면 이것은 모차르트의 강한 인정 욕구 너머 아버지에 대한 자기 증명의 열망 역시 내포된 것이 아닐까 싶다. 외적 독립과 내적 독립이 반드시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독립 이후에도 내면화 된 지배자의 시선이 나를 지켜보기 마련이다. 모차르트도 그 이후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얼마나 잘 해내고 있으며, 얼마나 노력하는지 애써 설명하려 했던 것을 보면 아버지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자유 음악가로서 모차르트의 작품들은 당대 수요자층의 취향에서 차츰 멀어졌다. ‘음표가 너무 많다’ ‘어렵다’는 평이 그의 음악에 자꾸 따라붙었다. 1789년에는 신청자가 단 한 명뿐이라 모차르트의 연주회가 취소가 되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하지만 오늘날 대작이나 명곡으로 사랑받는 작품들이 다수 배출된 모순적인 시기이기도 하다.
피아노 소나타 18번 역시 모차르트의 음악 인생 2기에 만들어졌다. 죽기 2년 전인 1789년, 그는 프리데리케 왕으로부터 6개의 현악 사중주곡과 공주를 위한 ‘쉬운’ 피아노 소나타 여섯 곡을 주문받았다. 그러나 의뢰받은 12곡 중 사중주와 피아노 소나타 모두 한 곡씩만 남았다. 그 까닭에 대해 <고전적 양식>에서 찰스 로젠은 “현악 사중주곡과 피아노 소나타가 각각 한 곡씩 완성되었을 때 너무 어렵다는 이유로 주문자가 주문을 취소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모차르트가 일생 동안 남긴 열 여덟 곡의 피아노 소나타 중에서도 마지막 18번은 가장 어려운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대위법적인 부분도 많고 협주곡의 기법도 곳곳에 쓰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모차르트의 상황은 불필요한 허세를 부린다거나 할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절박한 쪽에 가깝다.
“지금 프리데리케 왕녀를 위한 쉬운 피아노소나타 6곡과 왕을 위해 4 중주곡 6곡을 쓰고 있습니다. (...) 이 말고도 2개의 헌정에서도 얼마간 들어옵니다. 2, 3개월이 지나면 제 운명은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결정될 겁니다.”(<모차르트의 편지> 중에서)
마치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는 듯 보이지만 이 편지는 미하엘 푸르베르크라는 친구에게 돈을 빌리기 위해 쓴 편지의 일부다. 갚지도 못한 채로 빌려달라는 편지만 이미 몇 번째 반복하는 중이었다. 그에게 2~3개월 후 곡을 의뢰한 왕에게 고용될 지의 여부는 중요한 기로였다. 그런데 어려운 곡을 내놓아 주문마저 철회되도록 만들다니 여러모로 의아한 일이다.
너무나 능력이 뛰어났던 나머지 쉬울 줄 알고 쓴 곡이 상대에겐 어려웠을 뿐일까? 물론 가능성 있는 추측이지만, 수요자의 수준과 취향에 맞춰 쉬운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하는 것은 모차르트가 평생 동안 해온 일이었다. 심지어 그의 피아노 독주곡이 오페라나 교향곡 등에 비해 때로 저평가를 받은 이유도 피아노 곡의 대부분은 돈을 벌기 위해 교육용이나 가정용을 염두에 두고 썼기 때문이다. 천재적 음악성이 마음껏 발현됐다기보다는 주문에 맞추어 쉽게 제작한 ‘제품’ 정도로 여겨지는 장르인 것이다.
물론 피아니스트 알프레트 브렌델처럼 모차르트의 피아노 독주 작품들이 쉽다는 통념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많음을 밝혀둔다. 그는 “이런 작품에서 연주자는 모든 뉘앙스, 모든 작은 결정까지 혼자서 처리해야 한다 “면서 ”거대한 탐조등이 모든 것을 밝히고 있지만 연주자는 그것 때문에 눈이 부시지 않은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뮤직, 센스와 난센스] 중)”는 고충을 토로한다. 그러나 이는 프로 연주자들이 조금 더 공감할만한 소감일 테다. ‘잘’ 연주하고자 하면 끝도 없이 이상향이 높아지지만, 일단 악보는 어렵지 않다. 우리 아마추어들에게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란 지루한 체르니 산맥을 넘어 처음 만나는, 제법 폼나지만 그다지 난해하지 않아 보이는 음악이니까 말이다.
모차르트가 마음만 먹으면 화려한 성공 경험을 바탕으로 얼마든 당시 음악 소비자층의 취향에 맞춰 곡을 쓸 수 있었을 것이라는 쪽으로 다시 추리를 이어가 본다. 그렇다면 어느덧 그의 내면에서 자신만의 진실된 음악을 위해 더 이상 무엇과도 타협할 수 없다는 어떤 자아감이 견고하게 응고된 것은 아닐까?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분석처럼 “명령하지 않는데도 저절로 용솟음치는 음악적 환상들을 좇을 자유”를 누리기 위해 군주와 아버지에게 대항을 감행했고, 그러는 사이 평생 충족되지 않을 만큼 강력하게 염원했던 사회적 성공만큼이나 ‘음악적 자율성’ 또한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너무나 단단하게 자리매김을 한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달성하고 싶은 간절한 목표와 자신이 구현하는 결실의 간극 사이에 선 인간은 어떤 때는 세상에 분노하고, 어느 때는 청중 탓도 해보겠지만 어느 날에는 그 모든 바깥에서의 비난과 비평이 내면 안에서 자기의 목소리를 빌려 메아리친다. 이것은 내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괴로움이었다. 어쩌면 피아노 소나타 18번을 쓰던 모차르트도 ‘자기 의심’이라는 통증을 앓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이 곡을 살펴보니 이전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가 음악에서 엿보인다.
이제 나에게 이 곡은 보색처럼 상반된 색을 가진 두 목소리가 주고받는 대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트럼펫 소나타’ ‘사냥 소나타’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이 곡은 양손 유니즌으로 모티브가 시작된다. 전에는 이 부분을 트럼펫 소리를 상상하며 자신감 있고 시원하게 연주하라고 배웠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다. ’내 음악이 이번에는 사람들의 귓가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라는 식의 울적함이 묻어나는 의문문처럼 주제 선율을 살려보는 쪽이 더 재미있다.
두 마디 정도에 걸친 짧은 모티브에 이어지는 오른손 상성부의 빠르고 경쾌한 선율은 그럼에도 천재 음악가의 내면 중심에 확고하게 자리하는 음악에 대한 사랑과 강력한 자기 확신을 닮았다. 그래서 바로 앞 모티브에 더 대조적으로 천진난만하고 기세등등하게 응답해본다. 묵직하게 등장해 곳곳에서 메아리치는 제시부의 모티브를 재차 어르고 달래듯이. 때로는 한쪽이 우세했다가, 두 목소리가 팽팽하게 대립했다가, 어느 순간엔 안도하고 화해를 거듭하며 곡이 흐른다.
자기 의심과 확신의 대립 구도가 D장조라는 밝은 분위기 속에서 지속되는 것 또한 모차르트이기 때문에 말이 된다. 모차르트는 심연을 향할 때도 밝음을 떠올리는 사람이었다. 그가 스물아홉 살 때 아버지에게 쓴 편지의 일부에서 이러한 성징이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매일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와 대화를 나누면서 제가 슬프고 우울해 보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요. 저는 매일 이 축복을 창조주께 감사하고 온 세상 만민들에게도 축복이 임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피아노 소나타 18번을 쓸 당시 모차르트의 진짜 마음이야 알 길은 없으며, 그때의 상황이 곡에 반영되었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이런 부차적인 주석을 정성껏 단다고 해도 모차르트다운 소리를 내는 법이나, 모차르트가 의도했을 아티큘레이션으로 노래하는 방법, 유려한 손가락 테크닉 등에는 일절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역량은 부지런히 곡에 직접 몸으로 부딪히고 별도의 음악적 공부를 더해야 기를 수 있다. 심지어 어떤 학자나 연주자들은 곡에 대한 배경지식을 아는 것이 불필요하거나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며, 오로지 음악 자체로만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단정짓는 건 나처럼 방 안에서 홀로 음악을 탐험해야 하는 아마추어에게는 특히나 아쉽다. 그 곡을 둘러싼 모든 요소들이 하나의 곡과 보다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는 소중한 힌트이기 때문이다. 나야말로 음악적 지식이나 기계적인 반복 연습만으로는 곡과 끈끈하게 관계 맺어지는 데 실패하기 쉽다는 산증인이다. 헤럴드 C. 숀버그 또한 <위대한 작곡가들의 삶>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음악을 작곡가라는 사람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음악이란 그의 정신이 작동한 결과이고, 그의 정신과 그가 살던 시대에 대한 반응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 음악을 들으면서 우리는 작곡가들의 강렬한 '정신'과 접촉하게 되므로, 우리는 그들의 정신과 공명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공명의 정도가 클수록, 작곡가의 작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나는 그의 편에 찰싹 붙어 서서 내 곁에 줄곧 있어왔던 피아노 곡들을 더욱 진지하고 엉뚱하게 탐미해 볼 참이다.
내 방식대로 축적한 정보들을 가지고 곡에 밀도 높은 이야기를 부여해 보니 어느 부분은 왼손의 목소리를 더 들려주고 싶다거나, 같은 선율이 반복될 때는 어떤 식으로 서사를 펼치고 싶다는 식으로 연주의 ‘의도’가 생긴다. 다른 누군가의 동의를 받고자 애쓰지 않아도 되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의 엄청난 특권을 마음껏 남용하는 동안 나의 이야기와 작곡가의 서사는 한 곡 안에서 이렇게 만났다.
영영 껄끄러운 사이일 뻔했던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8번과 다시 이어지면서, 나를 오래 괴롭혔던 한 가지 엉킨 실타래도 슬그머니 풀 수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좋아하던 피아노를 쉽게, 빠르게 포기할 수 있었지?’라는 물음은 삶의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불쑥 나타나 훼방을 놓곤 했다. 무언가에 조금 호기심이 생기려 하다가도 ‘조금 해보다가 안 되면 또 그만두겠지’라며 미리 발뺌하거나, 그다지 좋아하지도 잘하지도 않는 것 앞에서 ‘나약하게 포기하지 않겠어’라면서 괜한 오기를 부리는 식이었다. 아마도 정말 사랑했던 것으로부터 도망친 나, 재능 없어서 미운 나에게 스스로 주는 형벌이 아니었을까.
내가 도망친 이유는 자기 의심 앞에서 고꾸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기를 초월한 천재의 말년을 샅샅이 살피며 타고난 가능성이 찬란한 사람조차도 숱하게 자기 의심의 시험대에 오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모차르트가 위대한 음악가로 남은 이유는 자신의 예술이 사회와 맹렬하게 충돌했음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걸어갔던 말년의 10년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노력에 비해 빨리 재능을 갖고 싶어서 직접 탐구하기보다 선생님의 지시에만 맹목적으로 따랐다. 그리고 좋아하는 마음이 다치기 싫다는 이유로 너무 빨리 간절했던 꿈을 포기했다. 이러한 과정은 스스로에게 상처로 남았다. 남은 인생 동안에는 피아노 앞에서 어리광만 부리기보다 나라는 존재를 통해 어떤 소리, 어떤 감정까지 가닿을 수 있는지 고통과 절망을 감수해보겠다는 정직한 사랑을 결심한다.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8번이 가르쳐 준 것처럼 그 쓰라림을 때론 달래고, 당당하게 맞받아치면서 그 모든 선율 자체를 하나의 음악이자 삶으로 삼고 계속 흘러갈 것이다.
‘이렇게 울적한 모차르트라고?’ 알프레트 브렌델의 연주로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를 처음 들었을 때 느낀 감상이다. 웬만한 모차르트 스페셜 리스트의 쾌청한 음색에 귀가 익숙해져 있는 감상자들이라면 비슷한 소감을 남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피아노 소나타 18번을 경험하고 나니 그의 연주가 한결 설득력 있게 와닿는다.
우치다 미츠코가 치는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8번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처음 유니슨에서 왼손으로 이어지는 테마와 오른손의 높은 선율로 대표되는 응답이 뚜렷하리만치 대조적인 색채를 띄고 있다고 느껴져서다. 그녀의 연주로 들으면 서로 다른 두 목소리의 대화처럼 이 곡을 이해해 보려는 시도에 더욱 도움이 된다.
경고! 함부로 이 버전을 듣지 말 것. 마치 선생님이 50번 반복 연습하라고 시켰을 때의 47번째 연습 같은 무성의의 미(?)가 흘러넘친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그 연주가 뭔가 말이 되는 얘기를 한다고 해야 할까? 글렌 굴드는 모차르트의 초기, 중기 작품은 좋아하지만 후기 작품은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퉁명스러운 가운데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연주 방식에서 오묘한 매력이 느껴진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한번 들으면 강렬하게 인식되어 버리므로 다시 한번 경고를 되새기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