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zart - Piano Sonata No.18 K.576
부모님이 모아둔 몇 권의 사진 앨범 중 내가 갓 태어났을 적 사진이 들어있는 앨범이 있다. 아마 그것은 내가 태어나고 부모님이 처음으로 마련한 앨범일 것이다. 그 앨범이 나에게 가장 애틋한 이유는 사진마다 엄마가 손글씨로 달아둔 장난기 어린 코멘트 때문이다. 분홍빛 꽃이 큼직하게 수 놓인 누빔 이불 위에 멀뚱히 누워 하얀 포대기를 덮고 있는 아이의 사진은 다 그게 그거 같아 보이는데, “태어난 지 이틀 째, 아이구 피곤하다” “낮에 푹 자뒀다 밤에 비상 걸어야지!” 같은 다채로운 문구를 엄마는 잘도 적어두었다. 이 앨범 속 사진과 엄마의 손글씨를 눈길로 어루만지다 보면 얇은 눈꺼풀을 가물거리며 자는 아기를 고개 숙여 빤히 들여다보며 기쁨과 설렘과 걱정을 수없이 헤아렸을 앳된 엄마, 아빠의 얼굴이 선해진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인연으로 얽혀 그간 싸우고 미워하는 일도 많았지만, 아주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보면 내게 이유 없이 쏟아져내렸던 투명하고 단단한 사랑이 있었다. 앨범 속 갓난 나의 무구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무뎌졌던 그 사실이 다시금 생생하게 체험되는 것처럼 뺨이 간질간질 해진다.
이기적이게도 그 커다란 사랑이 나를 유약하게 만들었다고 자주 탓해왔다. 실패를 예감하면 미리 도망치는 사람이 돼버린 건, 내가 패배를 염려해 혼자 해보도록 두지 못했던 엄마, 내가 다칠까 봐 너무 앞서서 걱정했던 아빠 때문이라고. 비겁한 핑계 뒤에 너무 오래 숨어왔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러나 사랑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역효과로 나는 스스로를 ‘실패하고 상처받을 가능성이 높은 인간’으로 여기게 됐고, 성장을 바친 댓가로 아늑한 자기 의심의 동굴 속에 오래 은거했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내 욕망에 후회없이 최선을 다해보는 선택은 못하지만, 적어도 그 안에 숨어있으면 창피를 당하거나 주변 사람들을 지나치게 실망시킬 일은 없어 보였다. 피아노를 그렇게 좋아했으면서도 초등학교 6학년 때 받아 든 두 번의 콩쿨 결과만 가지고 피아노에 대한 꿈을 대번에 포기할 수 있었는지가 스스로에 대한 오랜 궁금증이었는데,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보니 조금 이해되는 것 같기도 하다.
다치고 꺾일 줄 빤히 알면서도 계속해서 더 가보는 사람들은 실패의 가능성을 조금도 떠올리지 않는 걸까? 그들에게는 괜히 나서서 상처 입지 말고 안전한 곳에 있으라고 말하는 자기 의심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것일까? 뜻밖에도 이 의문에 어렴풋하게나마 힌트를 얻게 된 것은 모차르트의 삶을 자세히 짚어나가면서부터다. 뜻밖이라고 여긴 이유는 한 번도 자기 의심을 모차르트와 연관 지을 생각은 못해보았기 때문이다. 신의 실수로 모든 음악적 재능이 쏟아부어진 아이, 신동 중의 신동, 음악가들의 음악가로 불리는 천재에게 자기 의심은 영 거리가 먼 단어 같아 보였으니까. 그런데 모차르트와 아버지가 주고받은 편지를 읽다보니 의심할 여지 없이 느껴졌다. 이 천재에게도 자기 의심의 목소리는 수시로 드나들었다는 사실이.
모차르트에게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단순히 부모에만 그치지 않았다. 세 살 때부터 자신을 헌신적이고 엄격하게 가르친 음악 선생님이자, 음악가로서 한 세대를 앞서 겪은 선배였으며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고된 연주 여행을 늘 함께한 친구이자 매니저이기도 했다. 책 『모차르트, 사회적 초상』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태어나면서부터 유독 애정과 관심을 갈구하고 인정받으려는 성향이 강했다. 이러한 성정은 일찍이 아들에게서 특별한 재능을 발견하고서 집안의 신분상승이 가능해지리라는 기대를 품은 채 자식에게 헌신했던 아버지의 성향과 맞물려 공고하게 부자 관계를 결속시켰다.
돈독했던 부자 사이에도 균열은 일어난다. 결정적 계기는 1781년, 모차르트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잘츠부르크 궁정음악가의 자리를 박차고 나온 일이다. 표면적으로는 잘린 것이었지만 모차르트에게도 내심 간절히 바라던 결과였다. 모차르트는 자유로운 음악 활동을 억압하고 잘츠부르크의 명성만을 높이려 자신을 이용하는 대주교 아래에서는 죽어도 일할 수 없다는 뜻을 비치며 프리랜서 음악가로 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러나 레오폴트는 아들이 성인이 되면서 신동의 후광을 차츰 잃어버리자, 잘츠부르크에서나마 자신처럼 안정적인 일자리에서 가장 노릇을 해주기를 바랐다. 그는 자유 음악가란 ‘방탕한 꿈’일 뿐이라고 모질게 꾸짖으면서 모차르트의 선택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해방 소식을 아버지에게 편지로 전했는데, 이에 대한 아버지의 답장은 남아있지 않다. 『모차르트의 편지』에 따르면 “모차르트가 아버지의 편지에 화가 나서 찢어버렸으리라“고 추정된다.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서 자유롭지 않은 채로 부모와 엇갈린 방식을 택하게 되면 고난과 시련은 몇 배로 극렬해진다. 뜻을 이루는 데 따르는 자연스러운 어려움에 더불어 하루빨리 자신의 방식으로 증명해 부모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압박감과 조바심이 내면을 옥죄어 오기 때문이다. 이미 깊숙이 내면화되어 있는 부모의 눈은 자기 안에서 더 부풀려지고 왜곡되어서 매 순간 자신을 감시하고 의심한다. 나를 믿지 못한 채로 빨리 자신을 증명하려던 조바심이 내 20대를 앙상하게 갉아먹은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쓴 편지 중 “제가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와 같은 자기 방어나, “최고인 우리 아버지, 저는 아버지 마음에 들기 위해, 제 행복과 건강과 생활을 희생할 작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제 명예도 저로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와 같은 양가적인 문장에서 사랑받는 딸이고 싶으면서 동시에 온전히 내힘으로 서보이지 못했다는 좌절감을 향해 발길질하던 파릇한 내가 비춰보였다.
이 지독한 감옥에서 탈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택한 방식으로 성공해 내는 것이다. 하지만 천하의 모차르트에게도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18세기는 아직 자유 예술가가 음악으로 생계를 유지하기에는 시장이 제한적이었으며, 모차르트의 음악에 소비층으로부터 ‘어렵다’ ‘음표가 너무 많다’는 평이 자꾸 따라붙었다. 1789년에는 신청자가 단 한 명뿐이라 모차르트의 연주회가 취소가 되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더 큰 자리에서의 구직도 여러 번 시도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지금 프리데리케 왕녀를 위한 쉬운 피아노 소나타 6곡과 왕을 위해 4 중주곡 6곡을 쓰고 있습니다. (...) 이 말고도 2개의 헌정에서도 얼마간 들어옵니다. 2, 3개월이 지나면 제 운명은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결정될 겁니다.”
_『모차르트의 편지』 중
마치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는 듯 보이는 이 편지는, 사실 푸르베르크라는 지인에게 이전에 빌린 돈을 갚지도 못한 채로 거듭 돈을 빌리던 상황에서 추가로 돈을 빌리기 위해 쓴 것이다. 모차르트는 이 일을 통해 프로이센의 왕에게 고용될 것까지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의뢰받았다는 총 12곡 중에서 남은 것은 피아노 소나타와 사중주 한 곡씩 뿐이다. 찰스 로젠이 『고전적 양식』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현악 사중주곡과 피아노 소나타가 각각 한 곡씩 완성되었을 때 너무 어렵다는 이유로 주문자가 주문을 취소”했다고 전해진다.
주문자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자기 운명의 “사소한 부분까지 결정”할 수 있었던 중차대한 기회마저 날려버리게 만든 곡이 바로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8번이다. 그가 죽기 2년 전인 1789년에 쓰인 곡으로, 모차르트가 남긴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이기도 하다. 대위법이나 협주곡의 기법이 곳곳에 쓰인 이 곡은 지금까지도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중에서 가장 어려운 작품으로 꼽힌다. 나에게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콩쿨을 위해 연습했던 곡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나도, 모차르트도 이 곡에 걸려 한 번씩 고꾸라진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모차르트는 주어진 소명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계속해나갔다. 공주가 칠 수 있는 수준의 쉬운 곡을 주문 받고도 대뜸 어려운 곡을 만들어버린 일화를 생각해보면 모차르트가 일생 동안 가장 절실히 원했다고 알려진 경제력 만큼이나 그에게는 자신의 음악적 실현 또한 중요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도 인간이었으니 어린 시절의 후광을 뒤로하고 소비층의 냉담한 반응과 거듭된 실패를 겪는 동안에는 분명 의욕과 희망이 소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차르트가 생의 후반에 남긴 작품들은 그가 때로 고통에 몸부림쳤을 지라도 원하는 바로부터 쉽게 도망치는 인간은 아니었음을 방증한다.
그동안 나는 지나친 자기 의심이 내 결점이라고 줄곧 생각해왔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자기 의심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오히려 스스로를 단 한 번도 외부의 시점에서 객관적으로 보지 않는 사람은 좀 무섭기도 하다. 그러니까 내가 바로잡아야 하는 것은 자기 의심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무턱대고 자기 확신을 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심을 잘 다뤄서 그것을 딛고 한발 더 나아가는 방법을 연마하는 것이다.
아마도 매 순간 그 과정을 거치며 신동에서 위대한 음악가로 도약한 모차르트에게서 그 방법을 조금이라도 배워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피아노 소나타 18번 앞에 다시 앉는다. 이제 나에게는 이 곡이 상반되는 두 목소리의 은근한 기싸움으로 들린다. 8분 음표로 절도 있게 시작을 여는 두 마디는 넌지시 날아오면서도 당당하게 꽂히는 자기 의심의 물음표 같다. 반면, 연달아 이어지는 16분음표들의 재잘거림은 그에 천연덕스럽게 응수하는 두 번째 목소리 같다. 명랑한 듯, 하지만 결코 쉽게 지거나 주눅 들지 않는 기개가 모차르트를 닮은 것도 같다. 둘의 대화는 왼손과 오른손으로 나뉘어 팽팽한 언쟁을 이루기도 하고, 어느 시점에는 잠시나마 화해를 하거나 한쪽이 상대를 설득해내기도 한다. 이렇게 상상력을 맘껏 부풀리다 보면 고전주의 음악에 대한 금기를 깨는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나를 위해 연주하는 음악이니 제멋대로 주물러보기로 한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이야기를 부여해보니 곡 전체에 대한 나름의 설득력을 갖고 전개시킬 수 있게 되었다. 어린 시절 맹목적으로 선생님의 지시를 암기해서 치던 때와는 전혀 다른 곡처럼 느껴진다.
영화 <사랑하면 누구나 최악이 된다>에서 주인공 율리에는 의대 공부를 하다가 돌연 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꾸는가 싶더니, 갑자기 예술이 더 적성에 맞는다면서 카메라를 들었다가, 어느 날 쓴 글이 세간의 주목을 받자 이번엔 글을 써보겠다고 든다. 율리에를 보면서 기대한 만큼의 자기 증명이 실패할 것 같을 때마다 도망치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다급하게 선택하던 내가 투영됐다. 음악교육과를 전공했지만 임용고시는 졸업과 동시에 포기했고, 전공과 딱히 연관 없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여전히 음악을 좋아하는 마음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다가 라디오 PD가 되어보겠다며 언론 고시에 뛰어들었다. 그러는 동안 방송작가로 일했는데 시험에 연거푸 고배를 마시고 목표의식이 희미해진 뒤에도 계속 일을 하다보니 경력이 10년 남짓 되었다. 그럼에도 방송작가를 내 직업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과정에서 어느 것에는 진심으로 간절했고, 어느 것에는 어쩌다보니 몸을 담았다. 도피하기 위해 집어든 선택에도 나름의 의미가 있었고, 긴 시간 동안 괴로웠지만 우회하며 그려지는 삶 또한 잘못되거나 틀린 것은 아니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다만, 율리에는 다시 사진 찍는 삶으로 돌아가 앉았고 나는 글쓰기와 정면으로 마주해보려고 결국 또 책상 앞에 앉았다. 둘 다 더 이상 도망친 곳에서 운좋게 해법을 찾을 확률은 높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 아닐까. 실패자로 보이지 않기 위해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이라며 자기 위로하거나, 한 쪽 발을 빼놓고 도망갈 태세를 취하며 율리에의 대사처럼 “내 삶의 구경꾼”인 기분에 오래 지배 당해왔다.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실패의 두려움이 밀려와도 상처 하나쯤 남아도 괜찮다는 각오로 한 번쯤 뜨겁게 무언가에 맞서는 것 뿐이다.
물론 그러다보면 막막해지는 순간이 또 찾아올 것이다. 그럴 때면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8번 1악장을 펼쳐 재잘거리는 음표들의 명랑함과 단단함을 한껏 들이쉬어도 좋을 것 같다. 지금에라도 ‘나는 간절한 것에 실패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단단한 사람이 되었어’라는 답장을, 내게 이유없이 쏟아부어진 큰 사랑 앞으로 부칠 수 있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