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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coming Dec 26. 2024

우리의 살림 에튀드 연습법

Chopin - Etude Op.10-2


지난여름, 이유 모를 삶의 병증을 된통 앓았다. 건강에 특별히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지독하게 활기 없는 상태로 몇 달을 흘려보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던 것 같지만 가장 극복하기 어려웠던 뜻밖의 난관 중 하나는 살림이었다. 갑자기 살림 거리가 대단히 불어난 것도 아니고, 잘하나 못하나 누군가 일일이 감시하는 것도 아닌데, 늘 하던 자그마한 일들이 갑자기 바윗덩이처럼 묵직하게 눌러앉은 것이다. 세탁기는 다 돌아 빨래를 어서 꺼내달라고 아우성인데, 건조대에 널어둔 지 한참 된 빨래는 하나도 개지 못한 채로 이제 산책 좀 나가자고 낑낑대는 강아지를 붙잡고 맥없이 눈물만 쏟던 어느 날, 내 안에서 무언가 삐걱거리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엔 현실에서도 TV에서도 전업주부로서 집안일에 매여있는 엄마들을 보며 자랐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집안일이 여성만의 몫이 아니라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고, 집에서 요리하고 살림하고 육아하는 남자들의 이미지도 어렵지 않게 보였다. 그런 사회 분위기 변화에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기도 하고, 아빠가 전보다는 시간적 여유가 생긴 덕분에 내가 대학생이 됐을 무렵부터는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아빠가 집안 청소를 맡았다. 엄마는 아빠가 창문을 다 열어서 춥다며 늦잠 자는 내 이불속에 쏙 들어와 같이 눕곤 했다. 그 주말 풍경이 꽤 선구적이고 흡족하게 느껴졌다. 가정을 이룬 뒤의 내 모습도 그럴 것이라고 자연스레 상상했다. 물론 실제로는 전업주부인 엄마가 평일 내내 요리하고, 빨래와 설거지를 비롯해 각종 집안일을 챙겼지만, 내가 바라는 이미지만 마음대로 취사선택했다. 나는 집안일보다 더 중요하고 대단한 일을 하고 있을 거라면서.


현실은 영 딴판이었다. 자발적 반 실직 상태로 당분간이나마 내 글을 써보고 싶다는 뜻을 남편은 선뜻 존중해줬지만 이 상태를 얼마나 더 유지할 수 있는지는 깜깜하니 조바심이 들었다. 와중에 벼르고 별렀던 글은 형편없어 보여서 속이 까맣게 탔다. 게다가 시간과 돈을 절약하겠다고 집에만 앉아 있으니 바닥에 나뒹구는 머리카락이, 책더미 위에 쌓인 먼지가, 시들해 보이는 화분이, 허옇게 피어가는 냉장고 속 채소가 글 앞에 앉으려는 내 발목에 자꾸만 차였다. 거슬려서 도저히 안 되겠는 것들만이라도 허겁지겁 해치우고 나면 이상하게 반나절이 흘러있고, 나는 이미 지쳐있었다. 마음이 조급해지고 각박해지니 탓할 대상을 찾기 시작했다. 표적은 빤했다. 가까스로 정돈해 둔 공간을 망가뜨리러 오는 나의 구원자, 남편이었다.


사실 집안 공간을 주로 사용하는 것은 재택근무자인 나였다. 널브러진 책들, 바닥의 머리카락, 개수대에 쌓인 설거지의 출처는 십중팔구 나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에 남편의 흔적이 약간만 보태어져 있어도 유력한 용의자를 검거할 결정적 증거를 발견한 것처럼 굴었다. 문제의 진짜 원인은 자꾸만 무엇에선가 인정받으려는 욕심이었다. 글을 쓰겠다고 일을 줄이면서부터 남편의 근무 시간이 나보다 많고, 그가 더 많이 벌어온다는 사실에 점점 더 집요하게 신경이 쓰였다. 그의 묵묵한 지지와, 바깥의 풍파를 끌고 들어오지 않는 강인한 밝음에 내 나름의 방식으로 보답하고도 싶었다. 동거인으로서 나의 쓸모를 증명하고 싶은 욕구는 내 몸을 자꾸 살림 거리 앞에 끌어다 앉혔다. 남편은 집안일에 무던한 성격이라 집이 좀 지저분해도 그러려니 하고, 끼니를 채울 방법이라면 편의점 음식이든, 배달 음식이든, 간소하게 차린 밥이든 상관 않고 잘 먹는 편인데도 나는 자처해서 집안일의 기준을 높이고 스스로 버거워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집안일이 가져오는 괴로움 못지않게 즐거움도 느끼고 있었다. 뽀송하게 마른 채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는 수건을 차곡차곡 접어 벽돌처럼 쌓을 때, 거울에 방울방울 말라 앉은 물 자국을 걷어내고 다시 투명하게 닦아낼 때, 먼지나 머리카락을 우렁차게 흡입하는 청소기가 지나가고 나면 어김없이 환해지는 바닥을 볼 때, 주황빛, 초록빛, 노란빛 채소들을 또각또각 비슷한 크기로 썰어 볶거나 끓이면 군침도는 냄새가 온 집안을 돌며 맛있는 끼니를 맹세할 때... 나는 사뭇 즐거웠다. 피로에 젖어 못 이기며 하는 날들도 있었지만 그러한 일거리들이 책상 앞 자괴의 세계에 빠져들던 나를 끌어내어 정신을 개운하게 씻어주기도 했다. 매일 돌아와 눕는 우리의 보금자리를 아늑하게 가꾸고, 간소한 밥상이지만 맛있게 먹는 남편을 볼 때 우러나오던 순수한 행복은 왜 외면해왔을까? 어쩌면 살림이 더 이상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곡해해 살림에서 아주 벗어난 여성만이 더 진보한 위치에 있는 것이라고, 살림 자체를 하찮은 일로 폄하해온 것은 아니었을까?


두 사람 이상이 꾸리는 살림은 네 몫 내 몫을 명쾌하게 똑 떼어 구분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등가 교환의 수단으로 삼으려 든다면 우리가 주고받는 다양한 사랑의 방식들은 화폐처럼 삭막하게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보다는 그 안에 얽히고설킨 구성원들의 욕망과 감정을 다스리며 돌보아야 할 까다로운 생명체 같다. 살아가는 매 순간을 윤택하게 어루만질 수 있는 삶의 기술이기도 하다. 관점을 달리하니 집안일을 덜 할 궁리를 하기보다는 더 숙련할 방법을 찾고 싶어졌다. 처리해야 할 귀찮은 일이라고 여길 때는 남에게 떠넘기는 듯한 찝찝한 기분이 들어서 오히려 남편에게 집안일을 잘 나누지 못했는데, 그를 위해서도 이 기술을 함께 터득해야 한다는 명분이 뚜렷해졌다.


일상을 위한 돌봄의 기술은 어떻게 매끄럽게 숙련될 수 있을까. 언제부턴가 쇼팽 에튀드 작품 번호 Op.10-2에서 그 답을 구하고 있다. 쇼팽의 에튀드 곡들에는 ‘혁명’이나 ‘대양’ ‘겨울바람’처럼 곡의 분위기에 찰싹 달라붙는 제목이 붙어있다. 그러나 Op.10-2는 ‘반음계’라는 건조한 별명이 전부다. 음악적으로 고전주의를 숭앙했던 쇼팽은 문학이나 표제에서 영감을 받는다든지, 곡에 제목을 붙이는 행위를 내켜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음악적 발상과 결실들이 지극히 낭만주의적이었던 결과, 후세에까지 모두가 뜻을 모아 그의 음악들에 표제를 붙여 부르는 만행(쇼팽의 입장에서)을 저지르고 있는바. 나 또한 슬그머니 동참하며 Op.10-2를 ‘살림’이라는 혼자만의 애칭을 붙여주었다.


이 곡이 살림과 겹쳐 보였던 이유는 쇼팽의 에튀드 곡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난곡으로 꼽힐 만큼 어려운 데 반해 그다지 어려운 티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대학교 때 교수님이 과제곡으로 나에게 이 곡을 지정해 주셨을 때, 처음에는 내 실력이 많이 부족해서 나만 이렇게 쉬운 곡을 정해주셨나 싶어서 놀랐고, 연습해 보니 의외로 너무 어려워서 두 번 놀랐다. 이 곡의 난점은 오른손 3, 4, 5번 손가락으로 빠르게 반음계 스케일을 연주해야 하는 것이다. 이게 왜 어려운지 짐작해 보려면 손가락을 책상 위에 달걀 쥐듯 살포시 얹은 뒤, 4번 손가락만 위로 높게 들어보려고 해도 알 수 있다. 보통의 신체 조건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무리 애써도 4번 손가락을 다른 손가락의 반만큼도 들어 올릴 수 없다. 이처럼 깊게 뿌리내린 네 번째 손가락을 이리저리 뻗어가며 세 번째 손가락과 다섯 번째 손가락을 넘나들어야 한다. 장담컨대 나름의 노하우를 찾지 못한다면 이 곡을 열 마디도 채 연주하기 전에 오른쪽 팔목엔 뒤틀리는 듯한 통증이 찾아오고, 오른손은 쥐가 나듯 꼬이고 말 것이다.


살림과 상통하는 이 곡의 짓궂은 특성 한 가지가 더 있다. 보통은 곡에서 어려운 클라이맥스 구간을 작곡가가 알고 연주자도 알고 청중도 안다. 그 부분의 연주가 잘 이루어지면 인정과 박수를 받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살림 에튀드에서는 곡의 어려운 특성을 내세워 박수받을 생각을 해선 안 된다. 에튀드는 피아노 연주에 필요한 테크닉을 연마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목적과 용도가 명확한 장르다. 에튀드를 남긴 작곡가들이 여럿 있지만 유독 쇼팽의 에튀드가 바이블로 여겨지는 이유는 각 곡이 지닌 훈련의 목표가 뚜렷하면서 음악적으로도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다. Op.10-2가 아름답게 연주되려면 서커스에 가까운 오른손 3, 4, 5번 손가락 스케일을 강조하기보다 매 박자마다 규칙적으로 통통거리는 중간 성부가 아름다운 보이싱을 이루며 노래하는 편이 훨씬 매력적이다. 2024년 그라모폰상을 수상한 임윤찬의 쇼팽 에튀드 앨범에서 이 곡을 들어보면 그는 매우 적극적으로 그 노랫소리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특히 14초 무렵부터 이어지는 두 마디는 아주 친절한 가이드처럼 이 곡의 주인공이 오른손 반음계 스케일이 아니라 중음역의 메조소프라노임을 역설한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피아노 앞에 앉아 이 곡을 더듬더듬 연습하다가 묘하게 위로를 받았던 이유는. 묵묵하고 조용해서 더 빛나는 어려움이 있다는 걸, 그 숨은 헌신들의 존재 덕분에 울려 퍼지는 노래가 더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서부터 나는 이 에튀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곡을 연습하는 시간 동안 더 좋은 글을 쓰고 싶어서 끙끙대거나, 책 속에 파묻혀 있는 시간만큼이나 나는 집안 공간들을 돌보고 남편과 강아지를 위해 바지런히 몸을 일으키는 행위 또한 귀하다는 사실이 저절로 되새겨졌다.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할 일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 쉬워진 것은 아니지만, 나를 좀먹던 지나친 피해의식의 먹구름은 걷혔다. 이러한 변화는 집안일을 두고 남편과 불필요한 찌꺼기 없이 소통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었다. 남편에게서 집안일을 내가 지레 박탈해 온 것도 결과적으로 그에게 좋은 일이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서로가 바라는 집이라는 공간은 어떤 모습인지, 각자 어떤 것은 좋아하고 어떤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쉬워지지 않는지, 우리가 함께 엮어낼 수 있는 단정한 쉼의 공간은 어떠한 자연법칙을 따르는 세계인지 더 자주 이야기 나눠야 했다.


크게 티 안 나고 어려운 일을 묵묵히 잘해 나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기에, 나의 지선 선생님인 세이모어 번스타인의 저서 『자기발견을 향한 피아노 연습』에서 유의미한 두 가지 조언을 길어 올려 본다. 첫 번째는 현명한 운지법을 찾는 것이다. 어떤 작곡가는 운지법마저도 철저하게 자신의 의도대로 연주되기를 바라며 곡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쇼팽은 음악에 있어서 ‘아름답게 노래하기’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고, 이를 위해 파격적인 운지법 채택도 마다하지 않았다. 게다가 무슨 건반을 어느 손가락으로 칠 것인가는 손가락 가동 범위 등에 따라 연주자의 선택에 맡겨도 된다며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주장을 해 거룩한 전통을 따르던 피아니스트들의 반발을 샀다. 이 말을 가져와 적용해 보자면 스케일이든, 살림이든 관성만 따르기보다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더욱 윤기 있는 노랫소리를 위해 힘이 꽉 들어가 있는 오른손 대신 잠깐 왼손의 도움을 받아 숨을 골라도 되듯이, 머리카락 몇 개 보인다고 청소기를 켜서 온 집안을 다 들쑤시게 되기 전에 보이는 것만 얼른 줍고 나에게 더 중요한 일을 먼저 해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세이모어의 또 한 가지 조언은 시간을 제한하라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부과한 시간적 제한은 자기를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안에서 최선의 자발적 생각들과 행동들을 끌어내 준다”라고 말한다. 매끄럽게 유지하기에 까다롭고도 고통스러운 일일수록 시간을 정확히 설정해 두고 그 안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하라는 말은 완곡을 세 번 이상 치면 이후부터는 오히려 더 많은 미스터치를 연발하게 되는 Op.10-2나, 눈길을 돌리는 족족 해야 할 일이 무한히 꼬리를 물게 되는 재택근무자의 살림에 있어 특히나 유용한 충고다.


어느 날, 친구가 너무 좋더라며 발췌해 준 단락 안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사랑이란 긴 안목으로 보면 돈 문제를 해결하거나 배우자가 방바닥에 팽개쳐놓은 빨랫감을 챙기는 일 또한 포함하고 있다 “

_테드 창,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작가 노트 중


밥이 얼마나 남았는지 살피고, 강아지의 물그릇을 확인하고, 남편의 빨래를 반듯하게 개어 서랍에 넣어두고, 매일 저녁 함께 먹을 메뉴를 고민하며 냉장고를 뒤적이는 행위들의 본질은 사랑이다. 해야만 하는 일이거나, 안 하면 안 되는 일이라서가 아니라 삶의 공간을 돌보고 안식처를 보듬기 위해 행하는 것이다. 나는 그 행위의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외면한 채 살림을 둘러싼 외부의 정치에만 지나치게 휘둘려왔는 지도 모른다. 이제는 살림도 사랑처럼 맹목적으로 관습을 따르거나 보여주기식 강박에 얽매이기보다 우리만의 방식을 적극적으로 찾아보고 싶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연습의 시간을 잘 통과하고 나면 분명 또렷하게 들려오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나니 전처럼 연습도, 일상도 고단하기만 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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