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개교기념일>(Idiot Girls and School Ghost: School anniversary, 2024)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2관왕(감독상, 왓챠가 주목한 장편상)을 차지한 국산 독립영화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개교기념일>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제목만큼이나 장르의 합종연횡을 거침없이 시도하며 종잡을 수 없는 모양새를 보여줍니다. 학원물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수준급의 공포 연출을 가미한 예측불허의 코미디를 구사하는 것이죠. 논리 저 너머에서 날뛰는 듯한 '대혼종'의 모습을 한 이 영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란스럽기는커녕 사랑스러운 것은, 이야기를 내달리는 주인공들의 매력과 심지 때문일 것입니다. 난데없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와중에도 주춤거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소녀들의 일관된 목소리가 담겨 있는 영화는 '갈 지' 자라도 힘차게 그리면 명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모의고사 성적에서 8등급을 벗어나지 못해 선생님으로부터 '아메바' 취급을 받는 세강여고 3학년 세 친구가 있습니다. 영화감독을 꿈꾸는 씨네필 지연(김도연), 약소한 수의 구독자들에게도 진심을 다하며 습관적으로 브이로그를 찍는 인플루언서 꿈나무 은별(손주연), 촬영감독이 꿈이라 장비 잘 들고 다닐 수 있도록 수시로 이두 단련에 열심인 현정(강신희)이 그들입니다. 어느날 방송실에 있는 지연은 방송반 캐비닛에 보관돼 있던 비디오테이프에 어쩐 일인지 마음이 이끌려 틀어보게 되는데, 거기에는 1998년에 찍힌 이른바 '귀신 숨바꼭질' 영상이 있습니다. 영상에서는 세강여고의 세 친구들이 개교기념일 밤 학교에 남아 귀신 숨바꼭질을 하며 공포에 휩싸이는 장면들이 담겨 있는데, 알고보니 이후 이 세 친구들은 수능에서 만점을 받았더라는 겁니다. 지연의 손에 이끌려 결국 은별과 현정까지 이 비디오를 보게 되고, 이후 무서운 현상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를 떨쳐내려면 결국 '귀신 숨바꼭질'을 해서 귀신을 이겨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세 친구는, 샤머니즘에 일가견이 있는 듯한 2학년 후배 민주(정하담)를 포섭해 개교기념일 밤 '귀신 숨바꼭질'에 돌입합니다. 과연 그들은 끈질긴 귀신의 추격을 물리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설마 모두 수능 만점을 받게 될까요.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개교기념일>(Idiot Girls and School Ghost: School anniversary, 2024)
20세기 말 한국 공포영화의 부흥기를 불러 와 수 편의 시리즈로 이어져 온 <여고괴담> 시리즈부터 해서 여고라는 공간은 호러 장르에서 더 이상 새로운 장소가 아닙니다. 명백히 '여고를 배경으로 한 호러'인 <개교기념일>이 그런 영화임에도 새로움을 한껏 부여받게 된 원동력에는 일단 호러 장르를 수시로 비틀며 예측 불가능한 전개를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한을 담은 사연이 한국식 공포의 특징이고, 이를 기반으로 사회 비판적인 요소까지 더하는 것이 한국형 호러 장르의 특징이라면, <개교기념일>은 그처럼 한국식 공포 또는 한국형 호러 장르 하면 떠올릴 법한 요소들을 일절 배제합니다. 주인공들의 전사에 대해서도, 귀신의 사연에 대해서도 구구절절 이야기를 풀어놓지 않고 오직 주인공들과 귀신이 맞닥뜨리는 개교기념일 그 순간만을 주목할 뿐이죠. 그 과정에서 영화광인 주인공 지연의 입을 빌려 '클리셰', '신파', '점프스케어' 등 호러 장르의 갖가지 전형들을 직접 언급하기까지 하면서 이들을 재치 있게 피해 갑니다. 그렇다고 호러 장르를 조롱하기만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니, 기대 이상의 퀄리티로 연출된 귀신 시퀀스는 호러라는 장르로 구분하기 충분할 만큼의 각성(?) 효과를 불러일으킵니다. 물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주인공들이 예상치 못한 장면들을 연출함으로써 호러 장르 특유의 장면들이 일으키는 특유의 템포를 유머러스하게 뒤틀기도 하죠.
<개교기념일>이 이처럼 호러 장르를 재기 넘치게 갖고 놀며 익숙한 배경에서 신선한 즐거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이 영화가 주인공인 10대 청소년들의 현재를 그들의 시선에서 주목하기 때문입니다. 모의고사 등급 때문에 '아메바'라고 불리는 그들에게 분명 녹록지 않은 현실은 존재하겠지만, 영화는 그런 현실에 대한 탄식을 보내는 대신 귀신과 '맞다이'를 떠서 수능 만점을 받아보자는 그들의 순수한 의지에 집중할 뿐입니다. 성적제일주의 시대라 공부가 궤도에 좀 오른다면 반드시 같은 반 친구들을 등수를 다투는 '적'으로 두어야만 하는 상황. 그 궤도로부터 살짝 벗어난 주인공들은 귀신이라는 공통의 적 앞에서 스스로를 털어놓고, 그로써 비로소 서로에게 적이 아니라 여전한 친구로 남을 수 있게 됩니다. 수능 만점의 비책으로 '귀신 숨바꼭질'에 뛰어들든 그 귀신의 이름을 '윌리밍키' 따위로 짓든, 수능이라는 현실적인 목표를 기성세대가 보기엔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돌파한다고 한들 누구도 개의치 않습니다. '귀신 숨바꼭질'의 승자에게 주어진다는 수능 만점이라는 보상은 전설처럼 전해내려오는 신비로운 요행이 아니라 한때 친구였던 이들이 여전히 친구로 남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학교생활을 지켜내기 위한 나름 정당한 노력의 결과라는 것을 주인공들의 사그라들지 않는 에너지가 보여줍니다. 이처럼 영화는 작정하고 세팅된 호러 장르의 공간 안에서도 그 장르에 속박되지 않고 생동감 넘치는 동세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가져오며, 천진한 청춘들의 유대감을 흐뭇하게 보여줍니다.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개교기념일>(Idiot Girls and School Ghost: School anniversary, 2024)
장르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만큼 장르를 이탈하는 것 또한 대범하게 해낼 줄 아는 김민하 감독의 연출력을 바탕으로, 뾰족한 개성을 지녔지만 더없이 서로와 어울려 가는 친구들의 모습을 그려내는 젊은 배우들의 앙상블이 빛을 발합니다. 걸그룹 멤버 출신으로 더 잘 알려져 있던 지연 역의 김도연 배우는 눈앞에 닥친 상황을 마치 영화 장르를 읽듯 해석하며 용감하게 돌파하는 리더의 모습을 활기차게 보여주며 극을 원활히 이끌어 갑니다. 한편 역시 가수 활동을 겸하고 있는 은별 역의 손주연 배우는 시도때도 없이 카메라를 꺼내들고 브이로그 모드에 들어가는 인물의 엉뚱함 혹은 똘끼(?)를 사랑스럽게 보여줍니다. 미래를 위해 팔운동에 전념하는 현정 역의 강신희 배우는 영화에서 처음 보는 얼굴임에도 비범한 캐릭터 표현력과 조화로운 앙상블 모두에 능한 연기를 보여주며 눈도장을 찍습니다. 여기에 여러 편의 영화에서 강렬한 모습을 보여줘 온 민주 역의 정하담 배우는 이번 영화에서 대부분의 영화에서 보여준 무겁고 어두운 이미지를 벗고 웃음 지분을 톡톡히 책임지면서도 따뜻한 인간미를 잃지 않는 캐릭터를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물리칠 것이 귀신 밖에 없다면 그곳은 차라리 얼마나 즐거울까' 하는 상상에서 출발한 것만 같은, 영화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개교기념일>은 가히 'MZ 시대의 영화'라 할 만합니다. 천편일률적인 흐름을 거부한 채 장르의 흐름을 스스로 깨뜨렸다가 재정립해가는 연출 속에서도, 매끈한 만듦새와 그 안에서 한 시도 풀이 꺾이지 않는 목소리를 담아낸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여기에 과장되거나 단장되지 않은 배우들의 진솔한 연기까지 더해진 가운데, 호러라는 장르로 구축된 아찔한 놀이터 위에서 진실한 이야기를 전하는 이 영화는 올해 눈여겨 볼 만한 또 한편의 우리 독립영화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개교기념일>(Idiot Girls and School Ghost: School anniversary,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