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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Nov 14. 2024

복수의 전장이 혁명의 현장으로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4 - <글래디에이터 II>

<글래디에이터 II>(Gladiator II, 2024)


리들리 스콧 감독의 신작 <글래디에이터 II>는 2000년에 개봉해 전세계적으로 사랑받은 후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작품상 포함 5개 부문을 석권하며 작품성까지 인정받은 전편에 이은 무려 24년만의 속편이라는 점에서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자아냈습니다. 전편의 신화를 쓴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이 직접 연출한다는 점에서 기대를, 이미 역사를 쓴 영화의 속편이 그것도 수십년이 지난 후 주인공을 바꾸어 등장한다는 점에서 우려를 자아낸 것이죠. '속편의 당위성'을 관객이 납득하지 못한 사례를 최근 여러번 만난 상황에서 그 계보를 이을까 두렵기도 했던 <글래디에이터 2>는 다행히도 '나올 만한 속편'으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했습니다. 관객이 영화에 기대하는 지점을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충족시키면서, 전편과 구분되는 새롭고도 흥미로운 요소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녹여냈기 때문입니다.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새로운 얼굴들이 등장하듯이 말이죠.


로마가 칭송하는 영웅이자 최고의 검투사였던 막시무스가 복수의 사명을 다하고 세상을 떠난지 20년, 그는 시민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로마의 꿈'을 간절히 꾸었지만 그 꿈은 다시 요원한 것이 되었습니다. 쌍둥이 황제 게타(조셉 퀸)와 카라칼라(프레드 헤칭어)는 여전히 쾌락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가운데 정복 전쟁에 몰두하고, 명망 높은 장군 아카시우스(페드로 파스칼)는 그런 황제들의 명을 받들어 영토 확장의 치적을 세우지만 회의감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아카시우스가 이꾸는 로마군에 맞서 참전했던 누미비아의 군인 하노(폴 메스칼)는 아카시우스의 명령에 의해 전장에서 함꼐 참전한 아내를 잃고, 전쟁 포로가 되어 로마로 끌려갑니다. 분노에 찬 하노의 범상치 않은 전투 실력은 포로들을 눈여겨 보았다가 검투사로 스카우트해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는 야심가 마크리누스(덴젤 워싱턴)의 눈에 들고, 하노는 이내 마크리누스의 손에 이끌려 로마 한복판 콜로세움에 입성합니다. 검투사로 활약하며 로마의 중심의 서게 된 하노를 눈여겨 보는 또 다른 사람이 있으니, 바로 막시무스가 섬겼던 선왕 아우렐리우스의 딸이자 막시무스의 숙적 코모두스의 누나인 루실라(코니 닐슨). 루실라는 하노가 자신과 막시무스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시절 이별했던 아들 루시우스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렇게 하노의 행보는 더 이상 개인적 복수 이상의 것이 되어 갑니다.


<글래디에이터 II>(Gladiator II, 2024)


<글래디에이터 2>를 두고 가장 먼저 든 궁금증은 감독이 왜 이 영화를 만들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장르르 넘나들며 수많은 마스터피스를 만들어낸, 이제는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 수 있을 듯한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이 어째서 역시나 레전드로 남아서 속편 리스크가 극도로 큰 자신의 영화를 20여년이 지난 후에 제 손으로 새삼 만들기로 한 것일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30편 가까운 영화들을 만들며 수많은 걸작을 내놓으면서도 '에이리언' 시리즈 외에는 속편을 만든 적이 없는 그가 만들기로 한 속편이라면, 아마도 전편보다 더 넓어지거나 전편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나왔을 겁니다. 그리고 <글래디에이터 2>는 그 예상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전편 또한 상업영화였고 이번 영화도 상업영화이듯이 관객이 기대하는 부분을 어느 정도 충족은 시켜줘야 할텐데, 액션 연출과 시각적 스펙터클 면에서 <글래디에이터 2>는 그 기대치를 충분히 채워줍니다. 주인공 하노가 전쟁 포로가 되는 계기인 초반부 해안 공성전 장면은 바다와 땅을 넘나드는 장대하고도 폭력적인 전투 장면으로 관객의 시야를 시작부터 활짝 열어줍니다. 그렇게 열린 시야로 로마에 입성한 관객을 이후에는 한층 더 활용도가 높아진 콜로세움에서의 기상천외한 전투 장면들로 매료시켜놓죠. 거기에 사람과 사람이 맞붙을 때의 둔중한 타격감과 흙먼지 냄새 한껏 느껴질 법한 속도감까지. 이제 곧 아흔을 바라보는 연륜과는 무관하게 여전히 들끓는 감독의 에너지를 실감케 하는 볼거리들이 시작부터 끝까지 넘쳐납니다.


이렇게 전편보다 업그레이드된 볼거리 안에 채워지는 이야기는 그러나 전편과는 사뭇 다릅니다. 이번 편의 주인공 하노 역시 전쟁으로 아내를 잃고 하루아침에 포로가 되어 검투사로서의 삶을 시작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이는 그를 로마 한복판으로 진입시키기 위한 마중물 역할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전편 또한 로마를 쥐락펴락하는 다양한 세력들의 다툼을 배경으로 다루고는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폭압적인 권력에 의해 모든 것을 잃은 남자의 처절한 복수극이라는 정체성이 가장 뚜렷했습니다. 익명 뒤에 숨어있던 검투사 막시무스가 투구를 벗고 황제 앞에서 통성명하며 영원한 복수를 다짐하는 순간 극의 공기가 바뀌는 듯하던 짜릿함은 아직도 선명하죠. 그러나 이번 <글래디에이터 2>에서 하노가 그처럼 뜨거운 복수심으로 극의 공기를 휘어잡는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극이 전개되면서 드러나는 그의 정체에 따라 역할 또한 달라지기에 단순명료한 복수극의 감수성을 유지하기도 쉽지 않고요. 그보다 이번 영화는 하노가 중심에 서되 보다 다양한 캐릭터들이 비교적 균등한 비중으로 얽혀 들어가는 정치극에 가까워 보입니다. 막시무스가 주도하는 서사에 주변 캐릭터들이 정치적 배경을 띠고 살을 붙이던 느낌의 전편과 달리, 이번 편은 하노를 비롯해 로마를 두고 저마다 다른 처지에 놓인 여러 인물들이 모여 욕망 속에 쇠락해가는 로마라는 하나의 그림을 그려가는 느낌이었달까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나폴레옹> 같은 사극부터 <하우스 오브 구찌> 같은 현대극까지, 리들리 스콧 감독은 근래의 작품들에서 우스꽝스럽고 비열한 권력의 얼굴을 꾸준히 다뤄왔는데, <글래디에이터 2> 속의 권력 또한 그런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콜로세움의 위용은 압도적이지만, 그 안에서 펼쳐지는 갖가지 전투는 화려할수록 더 참혹하고, 그러한 참혹함으로 로마라는 번성했던 국가의 참상이 여실히 드러나고 욕망에 눈먼 권력의 무용함은 더욱 뚜렷해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는 꿈꾸었던 이상을 회복함으로써 로마의 정통성을 지키려 하고, 다른 누군가는 권력에 다가가고 나아가 권력을 쟁취함으로써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던 로마를 몰락시키려 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살상에 권력 투쟁까지도 쇼처럼 공개적으로 지켜보며 열광할 수 있는 곳인 콜로세움은 이들이 비로소 맞붙는 곳이자, 개인의 복수심이 역성혁명의 동력으로 번져나가는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복수를 넘어 혁명의 장이 되는 콜로세움의 요지경을 통해 감독은 결국 정통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혁명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일침을, 달콤한 권력의 맛에 점점 더 현혹되어 가는 세계를 향해 던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글래디에이터 II>(Gladiator II, 2024)


전편의 막시무스를 이 이상 훌륭할 수 없는 카리스마로 그려낸 러셀 크로우에 이어, 이번 편의 주인공이 된 하노 역의 폴 메스칼은 자연히 비교될 수 밖에 없습니다. 능숙한 강약 조절과 뛰어난 액션 연기로 활약하면서도 기대만큼 영화를 확 휘어잡고 이끌어간다는 느낌을 주진 않는데, 이는 복수극의 주인공이기보다 로마가 겪을 파괴와 변혁의 불씨가 되고, 보다 거대한 사명으로 그 불씨를 불길로 키워가는 인물로 하노가 그려지기 때문인 것도 같습니다. 한편 리들리 스콧 감독과 오랜만에 호흡을 맞춘 마크리누스 역의 덴젤 워싱턴이 보여주는 카리스마가 엄청납니다. 스스로가 노예 신분에서 자유인으로, 나아가 권력자로 거듭나 로마라는 국가의 한 표상이 된 인물을 연기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모든 상황을 예리하게 꿰뚫어보는 뱀과도 같은 젠틀함에 자신이 겪은 수많은 난관들로 인해 피도 눈물도 없게 된 이의 냉혹함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권력의 희생양이자 그만큼 권력을 절실히 탐하는 그의 모습은 스스로 로마 시대의 양면성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좌중을 압도합니다. 또한 로마에 대한 충성으로 활약을 보여 왔지만 그에 대한 회의감으로 고뇌하는, 누군가에겐 영웅이며 누군가에겐 적인 아카시우스 장군의 복잡한 내면과 그럼에도 잃지 않는 지도력을 선굵은 연기로 보여준 페드로 파스칼의 활약도 인상 깊습니다. 전편에 이어 출연하면서 이야기의 많은 변화 속에서도 더욱 중요한 역할을 띠며 이야기의 큰 줄기를 지켜내는 역할을 톡톡히 하는 루실라 역의 코니 닐슨, 광기는 있되 카리스마는 없음으로써 갈 곳을 잃은 로마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쌍둥이 형제 게타와 카라칼라 역의 조셉 퀸, 프레드 헤칭어 역시 극의 무게감에 걸맞는 연기를 보여줍니다.


전편이 국가를 향한 복수심에 불타는 남자의 뜨거운 멜로드라마로서 많은 관객들에게 어필했던 만큼, 이번 <글래디에이터 2>에 대한 기대 역시 그런 쪽으로 클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이 영화는 다소 실망스러울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전편이 보여줬던 드라마가 워낙 강력했기에, 그것을 따라가기라도 해보는 것을 거부하고 아예 다른 노선을 택한 영화의 선택은 나름대로 현명했고 또 흥미로웠다고 생각합니다. 원수와 조력자, 내가 지켜야 할 사람과 내가 끝장내야 할 사람을 넘나들며 만들어지는 역동적인 관계망과 이야기 속에서, 현란한 만큼 보잘 것 없는 권력의 민낯과 그에 비로소 맞서기 시작하는 이들의 피비린내 나는 혁명 속에서, <글래디에이터 2>는 전편을 보며 관객들이 속절없이 매료되었던 고대 로마를 다시 한번 흥미진진한 현장으로 만들어내는 데 성공합니다. 


<글래디에이터 II>(Gladiator II,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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