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영화리뷰 2024 - <아침바다 갈매기는>
지난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미리 본 영화 <아침바다 갈매기는>은 '뉴 커런츠' 부문에 초청되어 뉴 커런츠상을 비롯해 3개의 상을 받으며 작품성을 먼저 인정받았습니다. 여러 시상식에서 신인감독상, 신인여우상을 받으며 주목받았던 <불도저에 탄 소녀>의 박이웅 감독의 신작인 이 영화는 역시나 에너지 넘치는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그 이야기가 주목하는 곳은 어딘지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좀 더 가까운 현재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필연적일지도 모를 한 사건을 두고 혼란을 겪는 한 바닷가 마을의 이야기는 터전을 박차고 나와 꿈을 꿀 권리와 터전을 지켜야 할 도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든 이들을 끌어안으며, 예측할 수 없는 전개 끝에 이유는 저마다 달라도 상처 받고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인 다양한 사람들을 보듬습니다. 새로운 감독의 힘 있는 연출력, 새삼 그 진가를 드러내는 익숙한 배우들, 사려깊은 이야기가 더해져 부산국제영화에서 과연 인정받을 만한 작품성을 실감케 합니다.
동해의 한 어촌에서 나이든 선장 영국(윤주상)과 일하는 젊은 선원 용수(박종환)는 이곳에서의 삶이 버겁습니다. 이곳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결심한 용수는 계획을 세워 믿을 만한 사람인 영국에게 도움을 요청합다. 배 타러 나갔다가 용수가 사고로 실종된 것처럼 위장한 후, 그 사망 모험금으로 어머니 판례(양희경)와 베트남인 아내 영란(카작)과 함께 베트남으로 건너가 살겠다는 것입니다. 용수의 부탁을 받아들인 영국은 어느날 밤 영국을 보내주고 난 후 실종신고를 하고, 예상대로 마을은 발칵 뒤집힙니다. 용수의 아내 카작은 충격에 몸져눕고, 어머니 판례는 아들의 실종을 믿을 수 없어 하루가 멀다하고 부둣가에 앉아 수색을 종용합니다. 그러니까 가족들이 용수의 실종을 사망으로 인정해야 사망 보험금이 나오고 그래야 용수의 계획대로 가족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인데, 판례를 비롯해 가족들이 수용의 죽음을 믿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으니 계획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그러던 중 용수 앞으로 거액의 보험금이 걸려 있고 용수가 사망처리되면 그의 아내 카작에게 보험금이 지급될 거라는 소문까지 퍼지면서 카작에게 마을 사람들의 질투 어린 시선이 향하고, 이런 상황 속에서도 꾹 다문 영국의 입은 열릴 줄을 모릅니다.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 구성원의 실종 이후 마을 일대가 발칵 뒤집히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은 미스터리적인 터치가 매우 적절해 보이지만, <아침바다 갈매기는>의 박이웅 감독은 이렇게 장르적으로 이야기에 접근하지 않습니다. 용수의 죽음은 위장된 것이고 영국이 거기에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은 초반부터 드러나니 스포일러랄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전개로 주의를 놓을 수 없게 하는데, 그 추동력은 장르적 기교가 아닌 인물들의 심리입니다. 관객은 알고 있고 인물들은 모르는 것, 관객은 모르고 인물들만 아는 것이 그들이 살아온 삶의 궤적 위에서 교차하며 인물들의 향방을 시시각각 바꿔나갑니다. 한편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동해의 작은 어촌 같은 마을이 영화에서 등장할 때면 지극히 폐쇄적인 환경에서 어두운 사건들이 일어나는 게 클리셰와도 같이 나타나기 마련인데, 이 영화에서는 그렇게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도 인상적입니다. 오랜 세월 타지로 떠나지 않고 터전을 이루어 살아온 사람들이 많은 관계성이 돈독하고 그만큼 어느 정도의 폐쇄성이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나, 영화는 마을을 미스터리 장르의 효과적인 배경이 아니라 지금도 누군가 살아가고 있을 어딘가로서의 생명력 있는 공간으로 그리는 것입니다. 그 생명력이 비록 바다의 어느 경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해도, 살아있다는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인 것처럼.
이런 곳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지켜보며 관객이 느낄 감흥은 공포나 긴장감, 따뜻함과 낭만처럼 단순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다 이해하면서도 그 마음에 따라 일어나는 행동이 꼭 우리가 원하는 결과로만 향하진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이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살아야 할 삶을 결정짓는 현실이 싫어 떠나기로 결심하는 젊은이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그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행동으로 인해 고통받는 가족들의 모습이 줄곧 눈에 밟힙니다. 그 고통으로 인해 보이는 가족들의 모습이 가슴 아프면서도, 그로 인해 자꾸만 꼬여가는 사건은 답답하기만 합니다. 이런 양가감정은 비단 관객들만의 것이 아니라, 영화 속 인물들만의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이 마을은 숙명과도 같았고 그래서 이 고정된 터전 안에서 온정을 베풀기도, 모진 슬픔을 낳기도 하며 살아온 인물이 떠나겠다는 다음 세대의 선택에 심정적으로 완전히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그를 떠나보내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듯이 말이죠. 구성원들 사이의 따뜻한 유대와 변화에 대한 본능적인 텃세가 공존하는 곳에서마저도, 새로운 삶의 챕터는 시작되기 마련이고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은 똑같이 피어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섭리와도 같은 국면에서도 남을 수 밖에 없는 이들은 존재할 것인데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 것인지, 설움 한 줌 섞인 생각거리라 보는 내내 머릿속을 맴돕니다.
이렇게 한 줄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러나 분명 머리와 마음을 건드리는 감흥을 일으키는 명배우들의 열연이 영화를 바다처럼 깊고 넓게 채웁니다. 관객과 같이, 아니 관객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인물로서 극을 이끌어가는 영국 역의 윤주상 배우는 특유의 연극적 발성을 리얼리티 가득한 감정 표현과 결부시키며 영화의 넘실대는 드라마를 앞장서서 그려나갑니다. 괴팍하기 이를 데 없는 어르신 같아 보이지만 실은 지난 삶이 남긴 상처와 변화가 예고되는 앞날 사이에서 어렵게 마음 속 불씨를 틔우기로 결심하는 인물의 강인한 에너지를 오롯이 보여주죠. 그와 함께 영화에서 중요한 긴장관계를 형성하는 용수의 어머니 판례 역의 양희경 배우 또한 이야기에 격랑을 더하는 일등공신입니다. '모성애'라는 단어만으로 규정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가족을 향한 사랑의 크기만큼 불같은 모습을 보이면서도 거기에 스민 일말의 비애감으로 인해 '맹목적'이라고 할 수도 없는 깊고 뜨거운 감정을 실어서 표현해내는 그의 연기는 익숙하게 접해 온 TV 드라마에서는 대단히 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주말/일일연속극에서 유난스런 부모나 친척 캐릭터로 익숙하던 이 배우들이 이처럼 큰 스크린에서 감정을 한껏 북받치게 하는 명연을 보여주는 것을 보고 있자면,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명배우가 얼마나 많은가 실감하게 됩니다. 더불어 이들과 함께 용수 역의 박종환, 용수의 아내 영란 역의 카작 배우가 세대를 건너 보여주는 호흡 또한 무척 매끄럽고 인간적인 풍미 또한 가득합니다.
<아침바다 갈매기는>은 역시나 불도저와 같은 추진력으로 요동치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이면서도, 약하고 소외된 이들 속에 공존하는 떠남과 보냄, 팍팍한 현실과 희망 어린 꿈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이를 바탕으로 한 세심한 드라마 또한 깃들어 있는 영화입니다. 더불어 매체 연기를 통해 익숙하게 보아 왔던 배우들의 완전히 새로운, 그러나 누군가는 영영 모르고 누군가는 뼈아프게 알 삶의 한 부분을 정확히 짚어내는 연기를 통해, 우리는 떠나는 이들과 배웅하는 이들이 공존하는 어느 고요한 마을에 나란히 숨은 비애와 희망을 들여다 보게 됩니다.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 우리들도 언젠가는 누군가를 떠나 보내는 입장이 될 것이고, 머무는 것이 익숙한 이들에게도 언젠가 떠남을 결심하게 되는 순간이 올지 모른다는 진실이 영화를 내내 감돌며 짙은 여운을 새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