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영화리뷰 2024 - <히든페이스>
콜롬비아의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 한국영화 <히든페이스>는 장편 데뷔작 <음란서생>부터 해서 초지일관 '19금 영화'들을 만들어 온 김대우 감독이 이번에도 특유의 농도 짙은 '으른' 정서를 듬뿍 담아 내놓은 영화로, 보이는 것 이상의 진가를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매 작품을 그냥 '19금 영화'도 아니고 어른들이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는 깊은 심리를 그려낼 줄 아는 '19금 영화'를 만들어 온 감독답게, <히든페이스>는 자극적인 묘사와 파격적인 설정을 탐닉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로부터 시작되어 모습을 드러내는 욕망의 맨얼굴과 그 얼굴들이 벌이는 긴장감 가득한 게임으로 나아가며 보는 이를 쥐락펴락 합니다. 손쉬운 홍보 요소인 '파격적인 정사신'은 그저 첫번째 매듭일 뿐, 그로부터 펼쳐지는 이야기 보따리에 이내 몰입되어 정사신의 강렬함마저 어느새 부차적인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 성진(송승헌)은 어느날 약혼자 수연(조여정)이 떠난 후 남긴 영상편지를 접합니다. 눈앞에 둔 결혼에 대한 확신이 없다고, 그래서 베를린으로 떠나겠다고 영상 속 수연은 말하고, 그가 어디로 떠났는지 언제까지 떠나 있을 건지에 대한 단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수연은 성진이 몸담고 있는 오케스트라의 단장인 혜연(박지영)의 딸이자 오케스트라 단원인 첼리스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성진을 덮친 건 약혼자가 사라졌다는 슬픔만이 아니겠죠. 슬픔보다 더 큰 혼란에 휩싸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연의 공백이 예상보다 길어지던 중, 수연이 추천했다는 후배 첼리스트 미주(박지현)가 수연의 자리를 채울 오케스트라 첼리스트 단원 자리에 지원합니다. 슈베르트를 좋아하는 그의 음악적 취향에 이끌려서인지 아니면 다른 것 때문이었는지, 성진은 미주를 단원으로 맞이하고 이내 미주에게 걷잡을 수 없이 이끌리게 됩니다. 성진은 술기운에 미주를 집으로 불러들이고, 그렇게 수연과의 신혼 보금자리로 마련한 집에서, 수연과 함께 지냈던 안방에서 성진은 수연의 후배인 미주와 넘어선 안될 선을 넘고 맙니다. 그런데 사실 쥐도새도 모르게 자취를 감춘 줄만 알았던 수연은 그 모든 광경을 벽 너머 밀실에 갇혀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수연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타오르는 성진과 미주의 관계. 어쩌다 이들은 이처럼 기이한 구도 위에 서게 된 것이고, 이 구도는 어떤 방향으로 이어질까요.
앞서 얘기했듯 김대우 감독은 <음란서생>으로 장편 연출 데뷔를 한 이후 줄곧 높은 수위의 장면들이 포함된 성인용 영화들만 만들어 왔지만, 대체로 (블랙)코미디적 요소를 곁들어 풍자적, 해학적 색깔을 담아 왔습니다. <히든 페이스>는 그런 감독이 처음 만드는 현대극이자, 웃음끼를 빼고 처음 정통 스릴러에 가깝게 만드는 영화가 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방자전>에 이어 원전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더욱 강렬하게 비트는 재주를 유감없이 발휘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집안이 모두 들여다 보이는 비밀스런 공간에 갇혀 연인이 벌이는 불경한 행각을 모조리 지켜본다는 설정은 '훔쳐보기'의 정서를 중심에 내세운 '고자극 성인 영화'의 모습을 예상하게 하는데, 영화는 초반까지만 해도 국산 상업영화의 틀 안에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위에 가까운 정사신 연출로 그 예상에 부응하는가 싶더니 시점을 바꾸면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의 국면을 맞이하게 합니다. 성진, 수연, 미주는 단순한 불륜이나 배신 이상의 농밀한 관계를 맺고 있고, 그 관계 속에서 저마다 품은 욕망으로 인해 얼굴을 숨긴 그들의 비밀이 맞부딪치면서 사건은 벽과 벽 사이를 넘나들듯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초반 관객을 감각적으로 장악하는 성진과 미주의 뜨거운 행각은 그 모든 비밀에 다가가기 위한 매우 결정적인, 그러나 결코 전부는 아닌 마중물인 것입니다.
욕망을 두고 주인공인 세 사람은 각기 다른 태도를 취합니다. 수연은 욕망을 거침없이 표출하는 나머지 그 욕망의 진의를 확인해야 하는 인물입니다. 오케스트라 단장이 어머니고 지휘자를 남편으로 맞이하게 될 사람으로서 그저 욕망하고 싶은대로 살아가면 되는 인물인 수연은 그 욕망에 세상이, 사람이 온전히 부응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성진을 향한 자신의 욕망을, 자신을 향한 성진의 욕망을 확인하고 싶어하고 그로부터 뒤이은 모든 사건이 일어납니다. 반면 미주는 지금껏 통제당해온 욕망을 비로소 분출하면서 그 짜릿함을 알아가는 인물입니다. 수연의 후배이지만 수연과 사는 처지가 상반된 미주에게 성진과의 애정행각은 어쩌면 비로소 자신의 욕망이 추동하는 대로 움직임으로써 자신이 살아갈 삶과 세상이 바뀔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게 합니다. 성진은 욕망을 통제하는 걸 넘어 그렇게 통제된 욕망을 자신의 진짜 모습처럼 평생 가장하고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는 인물입니다. 그에게 수연과의 삶은 창창한 앞길을 보장케 하는 것이지만, 그 삶이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맞는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이유는 저마다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자신의 얼굴로 삼을 수 없는, 얼굴 뒤에 반드시 무언가를 감추어야만 하는 그들의 이야기는 어느 기점부터 마치 게임처럼 치열하게 맞부딪치며 정사신의 강렬함마저 어느새 잊게 만듭니다. 표현의 자극성에만 몰두하지 않고 그 안에서 들끓듯이 꿈틀거리는 욕망에 솔직한 인간의 얼굴을 놓치지 않는 감독의 내공이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그래서인지 김대우 감독의 영화에서는 늘 배우의 발견을 즐길 수 있었는데, 이번 <히든페이스>에서도 그 미덕이 충분합니다. 욕망에 휘청거리며 사건의 중심에 서는 성진 역의 송승헌 배우는 명색이 지휘자라는 사람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매번 흔들리는 인물의 양면성을 매끄럽게 표현해 냅니다. 연기가 좀 더 능청스러웠으면 좋았겠다 싶으면서도, 자신에게 부여된 품위와 격식을 지키기 위해 애쓰면서도 이내 불타는 욕망에 스스로를 내던지고 마는 유약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자연스럽게 그려냅니다. 하지만 <히든페이스>는 명백히 조여정-박지현 배우의 영화라고 밖에 말할 수 없겠습니다. 매 작품마다 무르익어가는 연기력을 보여주는 조여정 배우는 이번 영화에서 상황과 표현의 편차가 무척 큰 수연이란 인물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며 일선에서 몰입을 돕습니다. 욕망하는 대로 살아가는 인물의 과잉된 자아를 한껏 분출하다가도 벽 안에서는 치밀어 오르나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한껏 응축시켜 극의 중앙으로 타격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노련함과 힘이 모두 느껴집니다. 한편 미주를 연기한 박지현 배우는 이번 영화에서의 '발견'으로 꼽을 만한 배우가 되겠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난이도의 신체 연기도 그렇지만, 이내 그것을 잊게 할 만큼 뜨거운 욕망의 실체와 마주한 서늘한 인간의 내면을 한껏 정제된 표현으로 보여주는 그의 모습은 앞으로 있을 여러 영화제에서 신인상을 휩쓸 것을 기대케 합니다.
사실 '욕망에 휩싸인 인간의 민낯'에 관한 이야기는 창작물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고, 한없이 추락하는 인물들을 보여주면서 자칫하면 자극성으로만 빠질 위험이 크기도 합니다. 하지만 <히든페이스>는 자극을 꼭 필요한 순간에만 활용한 뒤, 각기 다른 방향으로 잡아당겨지는 욕망의 줄타기로 돌입하는 덕에 극의 동력을 잃지 않고 보는 이로 하여금 장르적으로 몰입할 수 있게 합니다. 인물들의 '숨겨진 얼굴'을 까발리는 데 집착하지 않고 각자가 '숨겨진 얼굴'을 품고서 그것을 들춰내려 하거나 약점잡으려 서로가 벌이는 게임에 집중한 것이 감독의 노련한 연출의 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를 강조하는 대사로 등장하는 말은 '인간은 포장이다'라는 말은 알고보면 허상으로 가득한 인간의 본질을 꼬집지만, <히든페이스>는 다행히도 그 반대로 포장 이상의 내용물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