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미리 본 영화 <서브스턴스>는 올해 칸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어 각본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요, 이 영화는 아마도 제가, 그리고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올해 봤거나 보게 될 영화들 중 가장 '도라이' 같은 영화가 될 것이 확실합니다. 코랄리 파르자 감독을 비롯해 데미 무어, 마가렛 퀄리 등 영화의 주축을 이루는 여성 제작진과 배우들이 만들어낸 이 '정신나간' 바디 호러는 상상의 한계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이미지들을 통해 진정 정신나간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며 말을 얹으려던 관객들을 입다물게 만듭니다. '물질'이자 '실체'를 의미하는 영화의 제목 '서브스턴스(Substance)'처럼, 영화는 존재에서 물질이 되어가는 인간의 이야기를 통해 역설적으로 인간의 실체에 대해 묻는 무시무시한 작품입니다.
한때는 오스카 트로피까지 거머쥐며 전성기를 구가했던 여배우 엘리자베스 스파클(데미 무어)은 나이가 든 현재 아침 건강정보(라고 쓰고 에어로빅 눈요기라고 읽는) 쇼의 진행자로 간신히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제 늙다리는 갈아치워라'는 방송사 수뇌부의 결정에 하루아침에 끝장나고 맙니다. 방송사 수뇌부인 하비(데니스 퀘이드)는 없는 데서는 늙은이 운운하더니 면전에서는 공연한 웃음을 띄우며 상냥하게 엘리자베스에게 해고 통보를 날리죠. 자신의 커리어를 과거형에 머물게 할 수 없었던 엘리자베스에게 손을 내민 것은 알음알음 비밀리에 판매되고 있는 신기술 '서브스턴스'. 주문자에게만 공유되는 루트를 통해 엘리자베스가 수령한 이 제품은 주문자의 DNA를 기반으로 '더 나은 버전'의 주문자를 만들어냅니다. 산고와 맞먹는(!) 고통 끝에 엘리자베스는 제품을 주입 후 더 젊고 아름답고 완벽한 버전의 자신인 수(마가렛 퀄리)를 탄생시킵니다. 단 이 제품에는 반드시 준수해야 할 사용 철칙이 있는데, '원형으로서의 나'와 '더 나은 버전의 나'가 예외없이 1주 간격으로 교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호러 영화의 모든 사달은 이렇게 빤히 제시되어 있는 규칙을 어기면서 시작되며, 수가 통제불능의 상태가 되어 자기 모습을 더 오래 유지하려 하면서 파국은 다가옵니다.
<서브스턴스>(The Substance, 2024)
<서브스턴스>는 기본적으로 '바디 호러' 장르에 기반한 영화입니다.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플라이> 같은 영화로 대표되는 바디 호러 장르는 어떤 계기로 인해 인간의 몸이 이형으로 변하면서 벌어지는 공포스런 사건을 다루고, 그 사건은 대개 당사자의 욕심을 통제하지 못하면서 파국으로 치닫게 됩니다. <서브스턴스>에서 그 당사자의 욕심이란 단연 아름다움, 그것도 '세월과 무관한 아름다움'일 것입니다. '서브스턴스'가 제시하는 '원형으로서의 나'와 '더 나은 버전의 나'는 일주일씩 교대하며 형성되는 균형 위에 있을 때 공존이 가능한데, '더 나은 버전의 나'가 지닌 시간을 거스른 듯한 아름다움은 그만큼 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원형으로서의 나'의 노화를 담보 잡은 것이므로, '더 나은 버전의 나'가 수명을 연장하려 드는 순간 노화의 무게추는 '원형으로서의 나' 쪽으로 순식간에 쏠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 결과 펼쳐지는 아수라장은, 어떤 글이나 말로 표현해도 스포일러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충격의 연속입니다. 이 정도면 수습되겠거니 싶을 때 더, 이제는 정리해야지 싶을 때 '아직 멀었다' 하면서, 그렇게 그 어떤 '바디 호러' 장르의 선배 영화도 가닿지 못했을 장르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에 이릅니다. 어떤 말이나 글로 설명할 수도 없는 후반 클라이맥스의 '대환장 쇼'는 너무나 터무니 없을 정도로 끔찍해서, 기겁하다가 이내 실소가 터져나올 지경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새어나오는 웃음을 이내 틀어막게 할 이 영화만의 뾰족한 지점이 있으니, 바로 이 사달이 일어나게 되는 동기가 어디서 비롯되는가일 것입니다.
대다수 '바디 호러'와 달리, <서브스턴스>에서 주인공을 파국으로 몰아넣는 것은 스스로가 자초한 욕심이 아니라, 외부 환경이 부추기고 떠민 끝에 살아야겠기에 싹튼 욕심입니다. 엘리자베스로 하여금 '더 새롭고 젊고 완벽한 나'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게 하는 것은 남성 중심의 미디어 산업입니다. 사람은 나이가 드는 게 당연하고 천하의 여배우에게도 적용되는 섭리일진대, 그런 자연의 섭리 따위 알 바 아니고 언제나 '젊은 여자'만이 미디어를 돈벌게 한다는 신념은 나이 든 여배우를 미디어의 뒤안길로 매몰차게 밀어냅니다. 반면 그런 신념을 주창한 남자들은 나이가 얼마나 들든 변함없이 한 자리를 차지하며 예나 지금이나 외모 타령에 여념이 없죠. 영화에서 엘리자베스의 나이듦을 질타하고 수의 젊음을 예찬하는 모든 방송국 수뇌부들이 하비를 위시로 하나같이 나이든 남자들이라는 점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런 상황에서 <서브스턴스>는 사회 드라마로서 '외모지상주의의 강박에 시달리는 나이든 여배우의 외침'을 보여주는 대신, 그 모든 외모지상주의적 신념에 있는대로 부응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바디 호러 장르의 관점으로서 보여줍니다. 종내에 목격하는 형언할 수 없는 이미지들의 향연은, 만족을 모르고 섭리를 부정하며 존엄을 잊은 채 계속되는 외모에 대한 요구에 꾸역꾸역 부응한 끝에 만들어지는 일종의 재앙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영화가 마치 "옛다 이것들아, 예쁘지? 예쁘지 않아? 예쁘다고 해야지?" 하는 듯 그칠 줄 모르고 엔딩까지 이어가는 폭주는, 현재도 여전히 고루하게 남성 수뇌부들에 의한 여성의 대상화가 만연한 현대 미디어 산업에 들이대는 총부리와 같이 느껴집니다. 그 총부리의 차가움을 느끼는 순간 나나 당신, 우리 남자들의 웃음은 이내 머쓱해질 것입니다.
<서브스턴스>(The Substance, 2024)
<서브스턴스>는 코랄리 파르자 감독의 갈 때까지 가는 연출에 힘입어 말 그대로 '혼신을 다한' 배우들의 연기로 칸영화제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충분히 거론될 만한 걸작 바디 호러가 되었습니다. 바디 호러 장르는 특히 인간의 욕망과 신체의 작용이 뒤엉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장르인 만큼 배우들의 연기가 무엇보다도 탄탄해야만 합니다. 그런 점에서 주인공 엘리자베스를 연기한 데미 무어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로 대번에 거론되어도 손색 없을 수준의 연기로 영화를 더욱 수준 높게 만듭니다. 누구나 다 아는 <사랑과 영혼>의 히로인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고 실제로 전신성형을 한 적도 있는 데미 무어가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연기는, 마치 스스로가 그간 대중의 수요에 부응하려 노력하면서 쌓여 온 억하심정을 쏟아내는 듯해 여간 강렬할 수 없습니다. '미디어의 쓰임' 속에서 어렵게 유지되던 배우로서의 존엄이 무너져 가면서 인간적으로도 파괴되어 가는 과정을, 폭발적인 감정 연기는 물론 배우 본인도 '이런 분장을 다 해보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싶을 분장을 더한 신체 연기로도 강렬하게 소화해 냅니다. 엘리자베스가 품은 (혹은 강요받은) 욕망의 산물이자 이내 엘리자베스를 잠식해 가는 존재인 수 역의 마가렛 퀄리 또한 훌륭한 연기를 보여줍니다. 마치 한계를 넘은 대중의 욕망을 상징하기라도 하듯, 광기 어린 맑은 눈을 하고서 뒷감당 생각 없이 질주하는 수의 위험한 에너지를 빼어나게 표현합니다.
소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나 영화 <너티 프로페서>처럼 외모에 대한 인간의 집착이 불러오는 파국을 다룬 창작물은 꾸준히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서브스턴스>는 미디어 산업의 (특히 여성을 대상으로 더 노골적으로 행해지는) 병적인 외모 집착과 그 안에서 고유의 가치를 희생당하고 도구화, 대상화되는 여성들의 현실을 바디 호러 장르의 틀을 빌려 극단적인 방식으로 고발한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하고 섬뜩한 현재성을 획득하는 영화입니다. 누구나 볼 수 있다고 절대 장담할 수 없는 정도의 이미지를 쏟아내는 영화이지만, 일단 본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결코 잊기 쉽지 않은 영화가 될 것임은 분명합니다. 영화 홍보 문구로 '개미친'과 같은 자극적인 수식어가 쓰이고 있는데, 그 문구가 놀랍게도 허언은 아닌 영화입니다.